<존재의 박물관>, ‘2024 서울 국제도서전’에서 우연히 만난
인류의 역사는 살덩이와 나무가 아니라, 금속과 세라믹 맛이 난다. (p.63)
세상에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이 항상 남는다. (p.44)
장소는 세상의 풍파를 이겨내고 살아남는다.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것. 이것이 장소와 우리의 차이점이다. (p.73)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 안에는 항상 우리 자신의 예전 모습이 숨어 있다. (...) 인생을 살며 어떤 어려움을 겪더라도 꼭 지키려고 구출한 바로 그것이 우리 인생을 이야기해준다. (p.134)
인간이 다른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 이 상대방은 인간의 두뇌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은 우리 안에 신경 흔적으로 남는다. (p.221)
이 책은 일상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자는 호소다. 지금, 인생의 바로 이 순간에, 우리와 다른 사람 안에 남는 것을 위해. 원한다면 ‘맹목적 변화’에 반대하는 마음가짐으로. (p.19)
- 스벤 슈틸리히, <존재의 박물관> 중 발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행성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요. 온 지구를 지배하기를 꿈꾸며 계속해서 영역을 넓혀 나가는 인간일까요. 남몰래 반격을 도모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인간 외 다른 동물들일까요. 혹은 모든 동물을 아우르는 드넓은 식물의 세계일까요.
땡. 모두 틀렸습니다. 이 행성의 주인은 ‘무생물’입니다.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며 혀를 차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고. 최근 흔히 통용되는 이 논리로 이 행성을 진단해 보자면,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고, 가장 강한 존재는 생명이 없는 무생물들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이 만들어냈고 발명해낸 온갖 ‘물건’들이죠. 그들은 아마도 우리가 전부 사라진 후 최소 백 년 이상 서서히 부식되고 갈라지며 우리가 이 땅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유일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덕분에 인류 종말 이후 외계인들이 지구에 도착하더라도 적어도 몇백 년 동안은 지구에 인류가 실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 아무곳에나 불시착해 표본은 채취하더라도 우리는 늘 그들의 레이더망에 걸릴 테니까요. 다 우리가 남긴 물건들 덕분이죠.
하지만 인류의 종말과 같은 거창한 주제를 거론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주변을 둘러보세요. 무엇이 보이나요? 이 글을 읽고 있는 휴대폰이나 컴퓨터, 그 옆에 있는 노트나 필기도구, 커피, 가방,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신발까지. 우리는 언제나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물건들은 곧 우리를 대변하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어느 날, 물건들만이 남아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설명해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곧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들의 집합체’인 셈이죠.
<존재의 박물관>은 그렇게 이 세상에서 우리를 쏙 뺀 모든 것들에 대해 논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부재한 상태에서 남는 모든 물질과 공간과 물건, 우리가 없는 시간에 남는 사람들과 관계들에 대해서요. 마치 ‘박물관’처럼 말이죠. 박물관이 ‘당사자 없는 당사자의 공간’인 것처럼, <존재의 박물관>은 우리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것들을 통해 우리를 설명합니다. 우선 과학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1분에 4만 개의 피부 세포를 세상에 흩뿌리고 있습니다. 1초에는 대략 600개, 하루에는 무려 5000만 개를 잃고 있는 것이죠.(p.43) 분자 단위에서 봤을 때, 우리는 곳곳에 우리의 생물학적, 유전자적 흔적을 남기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어딘가에 떨어진 우리의 조각들은 ‘우리가 그곳에 있었다’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생물학적 증거가 되죠. (범죄를 밝힐 때 아주 좋은 실마리도 되어 주고요.)
물론,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는 의식적인 층위에서도 이루어집니다. 현재에도 각종 유적지에 발견되는 누군가의 파렴치한 이름들과 오래된 식당 벽에 적혀 있는 ‘누구누구 다녀감’이라는 문구들은 알고 보면 폼페이 시절부터 있었던 유서 깊은 인류의 습관입니다. 고대 동굴의 암각화를 비롯해 전 세계 각국에서 발견되는 승전한 장군들이 적국의 벽이나 탑, 동상 등에 막무가내로 새긴 이름들, 폼페이 벽에서 발견된 사소한 고대의 낙서들 등은 모두 자신이 이곳에 있었음을 알리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은 이름들은 ‘또 다른 그들’로서 오랜 시간 회자되며 그들을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있게 해 주죠.
우리는 또한 소유한 물건을 통해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정의할 수 있기도 합니다. 2004년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독어 1위로 뽑힌 단어는 ‘합젤리히카이텐’이라고 합니다.(p.101) 이는 ‘가져서 축복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단어인데, 말 그대로 ‘최소한의 소유물’이라는 뜻이죠. 만약 하루아침에 전쟁이 터져 내가 가진 물건 중에 단 20kg밖에 가져갈 수 없다면, 무엇을 가지고 갈 건가요? 최소한의 생필품인 돈이나 식량 외에 내가 선택한 물건이 있다면, 왜 그것들을 선택했나요? 왜 하필이면 그것이어야 했을까요? 아마 그것들이 근원의 나를 구성하는 나의 본질이기 때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합젤리히카이텐’은 바로 그런 물건들,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품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품 안에 간직하는 사진이나 피난길에 오른 어린아이 손에 들린 곰 인형처럼 말이죠.
물건은 또한 누군가를 절실하게 그리워하거나 파괴하고 싶을 만큼 적대시하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연인의 남겨진 물건들’이죠. 사랑이라는 거대한 감정은 시작과 중간, 끝의 모든 순간에서 우리를 압도합니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들은 아주 작은 물건들, 단추나 립스틱, 옷가지나 입장권 하나까지도 소중히 간직합니다. 상대를 떠오르게 하는 물건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한한 가치를 지니죠. 하지만 같은 물건은 이별과 동시에 상반된 의미를 갖게 됩니다. 누군가는 떠나간 이를 잊지 못해 옷가지에 얼굴을 파묻고 채취라도 움켜쥐려고 하고, 누군가는 CD 한 장도 고깝게 여기며 망치로 당장 부수지 못해 안달을 내기도 하죠. 물건은 이렇듯 가끔 사람의 대체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추억이 깃든 물건은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기도 합니다. 고인이 남기고 간 낡은 가구들은 고물상의 눈에는 단돈 몇 푼짜리 고물일 뿐이지만, 고인의 가족들에게는 억만금을 주더라도 바꿀 수 없는 누군가의 흔적이기 때문이죠.
저자 ‘스벤 슈틸리히’는 이렇듯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수많은 ‘우리 아닌 것들’을 끝없이 논합니다. 수많은 물건과 타인과의 관계를 탐구하던 인문 에세이는 결국 마지막에 다시 ‘죽음’으로 되돌아오죠. 독일의 저명한 기자는 마지막 장에서 비로소 가장 중요한 질문을 수면 위로 끌어올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죠. 만약 우리가 필연적으로 많은 것을 남길 수밖에 없다면,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우리는 죽음 이후에 남을 나의 물건들을 한 번쯤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지녔던 물건은 나보다 더 오래 이 땅에 남아 ‘나’라는 사람을 기록할 테니까요. 그러니 죽음 이후 완전한 ‘무(無)’의 상태로 돌아가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지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한 번 정도는 나의 물건들을 돌아보며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고민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여기서 물건들이란 사물 그 자체가 아닌, 사물에 투영된 ‘나’. 여러 물건들 속에 잠들어 있는 나의 가치관과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나’는 내가 과거에 보인 모습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이고(p.317), 나의 물건들은 그 시간 속에 머물렀던 과거의 나를 담고 있는 수많은 작은 그릇들이니까요.
책은 에릭 에릭슨의 ‘심리사회적 발달단계 모델’을 통해 노년의 발달단계의 핵심을 ‘원숙함’으로 꼽습니다. 원숙함은 나와 진정으로 화해하는 것으로, 상처와 흉터들을 온전히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잘한 것과 잘못한 것들, 성공과 성취, 미처 이루지 못한 깨어진 꿈들을 부정하고 외면하지 않으며,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비로소 생의 마지막 발달단계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죠. 결국 육신의 마지막 주거지인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 가장 필요한 것은, 막대한 부도 명예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자세’인 셈입니다.
죽음의 순간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게 될까요. 고급 저택과 침대? 몸 하나 겨우 누일 수 있는 공간? 임종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 혹은 측은한 낯선 이의 시선들? 땡. 모두 틀렸습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우리가 마지막까지 소유할 수 있는 건 영혼이 몸담고 있던 육신뿐입니다. ‘생물로서 작동하는 나의 신체’야말로 제일 처음으로 받은 세상의 유산이자 마지막까지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소유물이죠.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그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진단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 봐야겠습니다. 여전히 내가 가진 수만 가지의 물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물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덮어 놓고 외면하고 무시하며 아무 곳에나 처박아 두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떠난 후, 나의 ‘존재의 박물관’에 남게 될 모든 것들은 결국 가장 첫 번째 소유물인 나의 육신, 즉, ‘나’에게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스스로를 혹사하고 무시한다면, 나의 박물관 또한 그런 부족한 모습으로 남게 될 테니, 이제부터라도 진정으로 나를 살피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연습을 해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