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벌레 그림 꿈>, ‘터무니 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나 꿈에서 사람이 됐어.
뭐라고?
사람이 되는 꿈을 꿨다고.
맙소사, 왜?
그건 나도 모르지. 근데 다리가 네 개뿐이라 힘들더라.
- 서현, <풀벌레 그림 꿈> 중 발췌
하찮은 것들을 애정합니다. 이건 수줍은 고백입니다. 거구의 몸으로 작은 것들 앞에서 헤벌쭉 웃는 장면은 어쩌면 징그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이가 반드시 귀여워야 할 필요는 없지만, 애정에도 상성이란 게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몰골(?)을 하고 있다면, 귀여운 것들 앞에서는 예의상 점잔을 떠는 게 맞겠습니다만.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마음과 재채기는 숨기고 싶어도 숨겨지지 않는다고. 길 건너편에서 강아지가 해맑은 얼굴로 깡총거리며 달려가면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는 것처럼. 우연히 마주한 고양이 앞에서 배시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찮은 귀여움은 제게 억누를 수 없는 충동입니다. 조건반사적으로 행복해지는, 본능 같은 것이죠.
<풀 벌레 그림 꿈>은 그래서 도통 지나칠 수가 없는 책이었습니다. 표지부터 세상 하찮은 귀여움으로 말초 신경을 자극했거든요. 동그란 구멍 안으로 보이는 쬐깐한 풀벌레의 몸통과 점 두 개뿐인 맹한 얼굴. 선으로 대충 그려 놓은 더듬이와 두 다리. 그 와중에 두 발로 꼭 잡고 있는 찻잔. 쓸데없이 디테일한 주전자와 찻잔에서 폴폴 올라오는 김. 하찮은데 섬세한 그림은 어느새 흥흥거리는 콧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콧구멍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 이것은 ‘귀여움 재채기’입니다. 귀여운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는 속마음이죠. 자매품으로는 참지 못하고 비실비실 올라가는 입꼬리도 있는데, 실실거리는 웃음과 함께 입꼬리까지 올라갔다면, 그건 제가 이미 위험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신호입니다. 눈앞에 있는 요것을 당장 집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귀여운 것에 미쳐 안달이 났다는 뜻이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도 어김없이 고 조그만 것(=<풀 벌레 그림 꿈>)을 집으로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의 마음은, ‘내용이야 어찌 되었든 요 쬐끄만 그림을 한 시라도 더 볼 수 있으면 참으로 행복하겠다.’였습니다. 벌레가 흙을 파먹든, 이파리 아래에서 동글동글 굴러다니든, 풀 줄기를 잡고 타잔 놀이를 하든, 지나가는 나비 등짝을 히치하이킹해서 날아다니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가요. 귀여운 건 가만히 앉아서 차만 홀짝여도 귀여운 것입니다. 귀여운데 차를 홀짝이다니. 정말 행복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무 기대 없이, 하지만 한껏 기대를 품고 연 <풀 벌레 그림 꿈>에는 예상 밖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매한 독자(=글쓴이)에게 훈계라도 하듯, 평면적인 귀여움 이상의 입체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었죠. 책의 주된 소재는 풀 벌레의 ‘꿈’입니다. 풀 벌레는 꿈에서 인간이 되고, 인간이 되어 풀벌레인 자신을 보게 되죠. 그렇게 완벽한 인간이 된 풀 벌레는 박물관에서 초충도를 보며 다시 찰나의 꿈을 꾸고, 꿈속에서 다시 풀 벌레가 됩니다. 되돌아온 풀 벌레는 꿈에서 깨어나지만, 우리는 이제 풀 벌레가 더 이상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풀 벌레가 꿈에서 경험한 사람은 몇천 년 후의 자신일까요, 아니면 경계가 사라진 꿈의 공간에서 인간과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룬 것일까요?
호접몽과 윤회 사상이 적절하게 섞인 그림책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때는 어쩐지 호젓하고 알싸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귀여움을 쫓던 본능적인 충동은 사라지고, 어느새 인생과 실존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고 있더군요. 가볍지 않게 가벼운 책이라 더 좋았습니다. 요새 들어 진지한 것에 진절머리를 내던 차라서 정신을 환기할 만한 책이 필요했는데, 그렇다고 너무 유치한 책은 또 읽기가 싫었거든요. <풀 벌레 그림 꿈>은 그런 최근의 기분에 가장 잘 들어맞는, 너무 가볍지도 묵직하지도 않은 책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풀 벌레 그림 꿈>은 기분이 가라앉을 때마다 뒤적거릴 듯합니다. 동양화풍의 단아하고 아름다운 배경에 하찮은 두 주인공이 뽀작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웃음이 새어 나오고, 부록인 스티커 주머니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풀 벌레의 ‘쪼끄맣지만 있을 거 없을 거 다 있는 사생활’은 볼 때마다 그지없이 행복해지거든요.
정말이지 하찮음만큼 행복으로 직행하는 천재적인 지름길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질적으로 삶을 지탱하는 행복은 대단한 성공과 성취가 아닌, 이런 촘촘한 그물망 같은 자잘한 행복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찮고 귀여운 것들을 애정하나 봅니다. 삶을 버텨내기 위해서. 달리 말하면 그럼에도 살기 위해서.
이건 정말 오랜 세월 간직해 온, 저의 수줍은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