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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바다 Jul 06. 2020

추억점

육십 살에 면접을 보다

딸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평소에 엄마가 애들하고 잘 통하는 편이니까 엄마한테 딱 맞다.라고 하면서 서류 한번 넣어 보라고 했다. 유아들에게 옛날이야기해주는 할머니를 뽑는다는 거였다.


지금까지의 내 삶은 그냥 돈을 벌려고 일을 했다면, 이건 돈보다도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이어서 보람된 일이라 해보고 싶었다. 나만 위한 삶에서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삶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될 것 같아 뿌듯했다.
 
서류심사가 끝나고 면접 날짜가 나왔다. 면접은 제시한 이야기를 일 분 정도 구연하고 나머지는 질의응답으로 점수를 매긴다고 했다. 기대에 차서 그날을 기다리며 틈날 때마다 '옛날 조선 시대에ᆢ ' 이야기하듯 외웠다.
 
유튜브에서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으며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할머니들을 봤다.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어떤 날은 애들한테 이야기해주는 건데 뭐 그리 어려울까,


손주한테 하듯이 하면 되겠지 하고 자신감이 차올랐다. 한두 명도 아닌 유아들에게 그것도 20분이나 해야 하는데 애들이 지겨워하지 않도록 재미있게 말할 자신이 없어서 그만둘까 어쩔까 하는데 덜컥 면접날이 다가왔다.
 
면접장에 도착했다. 화사한 한복을 곱게 입은 분들도 있고 은은한 색의  개량한복을 입은 분들도 보였다. 남편과 같이 온 분들도 있었다.


삼십 분가량 시간이 남아서 로비에 앉아 기다렸다. 유리 벽 너머 호텔의 만국기가 뙤약볕에 미동도 없이 달려있다. 조용히 두근거림이 일어 오른다. 떨어지면 그만이지 이게 뭐라고. 일부러 별것 아니라고 주문을 왼다.
 
면접실 문 앞에서 대기 중이다. 마음속으로 내가 할 이야기 부분을 되뇌어 본다. 속으로 남자 목소리를 내며 '울릉도 주변은 분명 우리 바다인데 어찌 왜 나라 배가 들어와서 물고기를 잡는다는 말이오.' 잊어버릴까 봐 머릿속에 꼭꼭 넣어뒀는데 되풀이할수록 하나씩 빠뜨리는 것이 영 불안하다.
 
면접관이 질문했다. 첫 번째 지원자가 전직이 유치원에 관계되는 일을 해서ᆢ

유아교육을 운운하며 답한다.

내 순서다. 아이들과 마음이 잘 통하는 것 같다며 어리바리하게 말한 것 같다.

세 번째 지원자로 넘어갔다. 교직 퇴직하고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봉사하러 왔다고 말한다.

평생 아이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들 앞에서  몇 번 떼쓰는 아이를 달래 봤다고 무슨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한 내가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공황장애가 온 것처럼 답답하고 땀난다. 더 이상 면접관의 말이 잘 안 들린다.

면접이 끝났다. 옆에 분들에게 창피해서 얼른 나왔다. 내가 노는 물이 아닌데 와서 얼쩡거린 것 같았다.  여태까지, 오판인 줄도 모르고 기대했다가 설렜다가 한 것이 우습고, 분위기를 너무 몰랐던 것이 바보 같았다. 씁쓸함이 쓰나미가 되어 나를 넘어뜨린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떤 지원자가 사진 좀 찍어달라고 휴대폰을 건넨다. 왼쪽 가슴에 이름표를 그대로 붙인 채 웃는다.

“면접 본 기념으로요.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서요. 그쪽도 예쁘게 입으셨네요.'' 하며 나도 찍어 준단다.
울적한 마음을 감추려고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웃으면서 포즈를 취했다.
 
그래, 전환점이 아니라 추억 점이다.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되는데 의기소침해진 바보가 보여서 진짜 웃었다.

내 능력에 맞게 살자. 생각이 뭉칠 때는 뜨개질하면서 풀고, 마음이 답답하면 글로 속에 것을 끌어내야겠다. 글 친구가 주위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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