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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바다 Aug 16. 2019

벼룩이의 여행


기차여행을 가자고 했다. 난 요즘 또 벼룩이 가 되어있다. 나이 육십인데 아직도 갱년기인지 잘 지내다가 한 번씩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 때마침 친구의 제안이 반가웠다.

컵 속에 갇혀서 유리 뚜껑 때문에  이상은 뛸 수 없는 벼룩. 평생 그렇게 컵 안에서 만 폴짝거리고 산 것 같은 내 삶이 새삼 답답해서 스스로를 우울 모드로 몰아가는 중이었다.


열차는 디젤 냄새를 풍기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구랑은 많이도 떠났었는데 몇 년쯤 뜸 하다가 오늘 함께 했다. 기차 안은 주말인데도 빈 좌석이 많아 조용하다. 모두들 빠른 케이티엑스를 좋아하는 모양이지만 우리는 느림을 즐겨 보기로 했다.


영주 봉화 춘양을 지나 기차는 분천으로 향하고 있다. 정동진까지는 4시간가량 걸린다고 한다. 차 창밖은 온통 초록 세상이다. 일상에 밀려 의식하지 못했는데 벌써 여름이 와 있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두근거리며 설렘을 마시고, 친구는 추억을 불러와야 한다며 찐계란을 까고 있다.


철로 변에 화사하게 핀 찔레꽃을 보고'찔레꽃' 함께 부르다가, 바다가 나오니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를 부르면서 대학 가요제가 한창이던 그 시절을 소환하기도 했다.


기차는 쉼 없이 달린다. 먹는 것도 시들하고 노래 부르는 것도 싫증 날 즈음, 신발도 신던 신발이 편하고 친구도 오래된 친구가 좋다 는 생각을 했다. 요즘 나를 힘들게 하는 속내를 털어놓고 싶어 졌다

어쩌면 나의 치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친한 친구라 편하다. 그도 가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채 굳어지지 않는 옹이들을 꺼냈다

지극히 성실한 아줌마로 살아왔는데 요즘은 그것이 굴레가 되어 답답하다. 저녁이 늦어지면 식구들이 아무 말도 않는데 혼자 눈치가 보여 퉁탕 거리며 바쁘게 상을 차리는 내 모습이 싫다. 늦을 수도 있는데 이런 생활에 길들여진 내가 싫다 고 했다. 친구도 몸살이 심해서 며칠간 집안일을 접어두고 몸을 추스르려 했는데 집안일이 자꾸 신경이 쓰여서 기어서라 청소를 했다고 한다 직장도 삼십 년 정도 하면 퇴직이라던데 우리는 퇴직도 없다며 투덜대다가 아마 죽을 때도 식구들 밥상 차려 주고 죽지 싶다며 웃었다.

둘은 의기투합해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비난했다. 바보같이 살아온 지나간 인생도 억울했다.  생각을  풀어헤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보다 잘 난 사람들의 뒷담화도 하고 급기야는 우리의 비늘만 건드린  사람들까지도 모조리 성토했다. 그러다가 문득 구차한 생각이 들었다.  운명이니 팔자로 밀어보다가 슬픔까지 데려왔다.
한참을 조용하게 창밖이 지나갔다.

차는 달리고 달려 정동진에 도착했다. 시원한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바람이 없는 날이어서 파도가 하얀 레이스 같이 잔잔했다. 여기까지 와서 바다의 맛을 모르면 안 된다며 가장 낮은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못생긴 발을 내놓았다. 쑥스러운 내 발은 뜨거운 모래를 밟기도 하고, 파도가 자잘하게 다가오자 재밌는 듯 겅중겅중 뛰기도 했다. 잔 물결에 날개를 펼치며 비틀거렸다. 파도를 밟는 것 만으로 들떠서 마주 보며 웃고 또 웃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해안가 식당을 찾는데 어째 낯선 느낌까지 좋았다. 생선구이집에서 푸짐하게 먹고 오늘의 목적지 심곡항으로 갔다.

다리가 떨리고 무서웠지만 친구가 말했다. 지금 못 타면 이번 생에서는 영영 못 탄다고. 투명카누에 앉으니 안전했다. 투명카누를 탔다. 바다 밑은 고요했다 일렁이는 풀잎 사이로 작은 물고기가 간간이 지나갔다. 우리는 잠시 노를 젓지 않고 가만히 바닷속을 구경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멋있는 바다풀들과 색색의 물고기들이 오가는 굉장한 광경을 많이 봤지만, 내 눈으로 직접 보는 지금 이 물 밑이 큰 감동이다. 왼쪽, 오른쪽으로 노를 저으면서 방향 전환도 하고 다른 카누와 속도 경쟁도 했다. 무서웠다가 즐거웠다가 하는 사이 몸은 땀범벅이 되었지만 즐거웠다.


동해서 묵호항을 지나 기차는 내가 탄 시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두운 창밖을 무심히 바라본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기차 안의 내 모습이 물끄러미 보인다. 철없는 아이 같기도 하고 듬직한 중년이기도 한 어떤 여인이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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