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실수

자기반성

by 가을 바다

캘리그래피 배우는 시간이었다. 상반기 초보 강의 마지막 날이라 그동안 배운 글자를 카드에 써 보기도 하고 종이컵에 짧은 문장을 멋스럽게 쓰기도 했다. 요즘은 법정 스님의 글이 울림이 와서 자꾸 손이 간다. 예쁘게 써서 휴대폰 바탕화면에 넣고 켤 때마다 보기로 했다. 특히 이 문장이 좋았다.
"입에는 말이 적게, 마음에는 일이 적게, 뱃속에는 밥이 적게."
말실수도 잘하고, 쓸데없이 깊이 생각해 축 처져있기가 일쑤다. 또 혼잡스런 감정을 지운다고 과잉으로 먹어 버릇하는 내게, 일침을 놓는 말이다. 수업 내내 글귀를 따라 쓴다. 많이 쓰고 자주 눈에 익히다 보면 나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다듬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쉬는 시간, 누군가가 다과를 챙겨 왔다며 먹자고 했다. 조금 지루하던 차라 반가운 마음으로 빙 둘러앉았다.
“이쪽이 언니지요?”
갑자기 내가 말했다. 옆에 있던 분이 내가 언니라며, 나이 차도 많은데 왜 그렇게 말하느냐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동생분이 언니보다 키는 크지만 좀 순수하고 앳돼보였다. 그분들은 평소에 먼저 와서 맨 앞자리에 둘이 앉아 글 쓰는 연습을 하던 터라, 뒷모습이 더 익숙했다. 얼굴은 몇 번 안 봤고 말을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그 언니는 수업 자료를 인쇄해 나눠주기도 해서 반장처럼 느껴졌고, 고마운 마음도 갖고 있었다. 자매 사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누가 언니인지 굳이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는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내서 분위기를 불편하게 했을까.

밤이 되어 잠자리에 누웠는데, 낮에 동생분의 선한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한 말에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던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살아오면서 나도 그런 말을 가끔 들었다. 마흔다섯 살 무렵, 이웃 언니와 함께 자주 어울려 다녔다. 그 언니는 쉰세 살이었는데, 사람들은 나를 언니로 착각하곤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지레짐작으로 나에게 '언니 같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왜 굳이 말해서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오늘 언니분이 동생 마음 상할까 봐 먼저 대답하고 속상해했다. 눈치 없이 말한 것이 창피하고 자책감도 들었다. 또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했는데.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은 더 복잡해진다. 전화번호나 이름도 모르고 아는 것은 공지 알릴 때 쓰는 단톡방뿐이다. 사과할 방법을 생각하다가 때를 놓치고 뒷북치는 내가 한심해서 뒤척인다.

옛날에도 이런 문제로 머리를 싸맨 적이 있었다. 모임 후에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을 어쩌지 못해 심란한 밤을 보냈었다. 말을 좀 많이 했구나 싶은 날은 다음 날까지 마음에 구멍이 숭숭 나서 썰렁하고 찜찜해했다. 어쩌면 별일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엄청나게 잘 못한 것도 같기도 했다. 이럴 때는 과하게 반성하고 나를 후려쳐야 조금 상쇄되는 것 같아 편했다. 잘못한 내가 나를 괴롭히는 일에 쫓길 때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옅어지든지 아무 일도 아닌데 무슨 소리냐고 웃으며 괜찮다고 하면 풀려나곤 했다.

밤늦도록 잠 못 들고 미안함에 몸서리치며 나를 후벼파고 있다. 새벽 2시도 넘었다. 뱃속에서 꼬르륵거린다. 뒤척이다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유를 데워서 먹었다. 허전했다. 마음속 허기가 가시지 않아 식빵 한 조각을 꼭꼭 씹어 먹으며 낮의 일을 곱씹어본다. 어이할꺼나 '뱃속에는 밥이 적게'

를 또 놓쳤다.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어 붓을 든다. 보낼 수야 없겠지만 오늘을 기억해서 다시 한번 나를 다듬어 보려 한다. 반성의 뜻이 느껴지게 수업시간에 배운 대로 자음 모음 하나하나에 천천히, 정성 들여 써야 할 것 같다.
‘자매 분들, 괜한 말을 해서 마음 상하게 한 점 죄송합니다, 고의는 절대 아닙니다. 어제는 지나가는 못된 바람이 머리카락을 조금 날렸다고 가볍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크게 반성하고 있으니 모쪼록 마음 푸시길 바랍니다.’
몇 번을 고쳐 썼다..
아직 초보 단계라 글씨에 감정을 싣기가 어려우니 최대한 정중한 느낌을 나타내려고 모음을 약간 굽혀서 써 본다.

희뿌연 안갯속에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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