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하게 무관하게

by 월요희비극

나는 오랫동안 쉽게 설레는 사람이었다. 열한 살 때에는 객관적으로 진짜 별로라고 생각했던 피아노 학원 오빠가 너 예쁘다,라고 한번 말한 뒤로 그 오빠만 보면 괜히 설렜다. 어른들 외에 남자 사람이 나한테 예쁘다고 한 건 그 오빠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날에도 다음다음 날에도 그 오빠는 여전히 뚱뚱하고 못생겼는데 이상하게 잘생겨 보였다. 살이 올라 목뒤가 접힌 모습까지 귀여웠다. 그놈이 정말 쉽게 다른 애한테도 너 예쁘다, 하고 말하는 걸 목격하고서도 콩깍지가 잘 벗겨지지 않아서 왜 잘생겨 보이지? 괴로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시신경이 돌아온 건 나 대신 우유를 마셔준 반장을 좋아하면서부터였다. 동급생보다 한참 작았던 나보다도 작고 마른 애였는데, 마시기 싫은 우유를 보면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내게 “대신 마셔줄까?” 하고 물어본 그 애가 되게 듬직하게 느껴졌다. 걔는 정말 자기가 마시고 싶어서 그랬을 텐데, 우유를 마셔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배가 아프던 참이어서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걔가 내 우유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동안 꼴뚜기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와, 진짜 잘생겼다, 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그 뒤로 어떤 애가 너 쟤 좋아하냐고 물어보기 전까지 나는 매일 반장의 책상에 내 우유를 놓았다.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게 소문나는 건 너무 끔찍해서 반장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미쳤냐? 하고 쏘아붙인 다음 날부터는 우유를 변기에 쏟아버렸다. 반장은 그 모든 상황에 아무 관심 없는 눈치였다. 그동안 내가 준 우유가 몇 팩인데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놈이 야속해서 같은 교실에 있는 것이 괴로울 정도였다. 다행히 곧 학년이 바뀌었고, 반장과 나는 다른 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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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때에는 처음으로 고백을 받았다. 누가 봐도 잘생긴 전학생이 나를 좋아한다 했고, 태어나 처음으로 화이트데이 때 사탕도 받았다. 재연 프로그램 등에서 단역을 하던 아이였는데, 큰 비중은 아니었지만 한두 컷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그 애는 ‘연예인’으로 불렸다. 그런 애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애는 나와 달리 좋아하는 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아서 나는 좀 많이 행복했다. 그런 마음과 별개로 누가 나를 좋아하고 내가 누굴 좋아하는 건 아직 부끄러웠다.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싫어한다 말했고, 정신을 차렸을 땐 6학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학생은 엄청 잘나가는 애의 남자 친구가 되어 있었다. 그 여자애는 발육 부전인 나와 달리 가슴도 어마어마하게 컸는데 어느 날 내 등을 쓱 만지더니, 어머, 너 브래지어도 안 해? 하고 말했다. 너무 크게 말해서 주변 애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정말 할 게 없어서 안 한 거고, 그러니까 그날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살면서 한 번도 브래지어를 해본 적이 없는데 억울하고 창피해서 죽고 싶었다. 그 커플은 초딩 주제에 유난스럽게도 연애를 했고 나 혼자 아무리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그래도 6학년이 되고부터는 몇 번 더 고백을 받아보았다. 저 새끼가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하고 기도할 정도로 싫어하던 짝이 또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 내 친구가 좋아하는 애 괴롭히지 마, 하고 그놈을 패주던 애도 있었고, 신발주머니에 편지와 함께 사탕을 두고 가는 애도 있었다. 신발주머니에 먹을 거라니. 더럽지만 달콤했다. 그런 관심을 받아보아서일까. 이제 예쁘다는 말에 무조건 설레지는 않았다. 반에서 내가 제일은 아니지만 다섯 번째 정도로는 예쁘다 생각했고,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다. 그 뒤로는 설레긴 해도 설렌다는 이유로 몇 날 며칠을 지켜보거나 좋아하지는 않았다. 집 앞에 선물을 가져다놓고 도망가는 애가 누군지 알아도, 색색의 볼펜으로 내 이름을 가득 적어 ‘사랑해’의 모양을 만든다거나 ‘사랑해’를 가득 적어 내 이름을 만든 편지 같은 걸 받아도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런 게 다 유치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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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K를 만난 것이다. K를 처음 본 건 중학교 2학년이 된 첫날이었다. 나만 앞 반에 배정받고 친한 친구들은 모두 뒤 반으로 배정받아서 위층 복도에 놀러 갔는데 친구와 몸싸움을 하며 노는 애를 봤다. 남자애들이란,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때 친구한테 잡혀 있던 상체를 일으킨 K의 얼굴을 보았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거짓말처럼 주변이 하얗게 변해서 K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반으로 돌아와보니 K가 앉아 있었다. K도 우리 반이었던 것이다. 그날 친구에게 아까 너랑 놀던 애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아, K? 우리 초등학교 나왔잖아,라고 말했다. 저렇게 잘생긴 애를 왜 여태 보지 못했는지 신기할 정도로 K는 완벽했다.

그날부터 내 모든 신경은 오로지K 에게 쏠려 있었다. 무섭기로 유명한 사회 선생님 시간에 K만 쳐다보다가 모두가 선생님께 인사할 때 혼자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있을 정도였다. 선생님이 너 뭐야? 누굴 보고 있는 거야? 너 혼자 다시 인사해!라고 소리쳤을 땐 수치스러움과 함께 내가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 하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런 관심의 결과로 나는 K네 집과 우리 집이 같은 방향이라는 사실과, K에게 여자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K를 좋아하는 애들도 알아냈다. K는 엄청나게 인기 많은 애는 아니었지만 나처럼 미쳐 있는 애들이 전교에 다섯 명 정도 있는 애였다. 내가 알아낸 애들만 다섯 명이었으니 아마 더 많았지 싶다. 다른 애들도 눈이 있으니까 나 말고도 K를 좋아하는 애들이 있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도 막상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정작 K와는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었고 K의 핸드폰 번호도, 버디버디 아이디도 몰라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매일 누군가 K에게 고백하는 꿈을 꿨다. 그런 아침이면 K는 나를 알기나 할까? 이름이랑 얼굴 정도는 알고 있으려나? 그것도 모르려나? 괴로워하며 학교에 갔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나니 아무리 생각해도 K가 나 아닌 다른 여자 친구를 사귀는 일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친구에게 K의 버디버디 아이디를 물어보았다. K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냈고, 나를 아냐고 물었더니 K는 응, 부반장이잖아,라고 했다. 나를 안다니. 나는 다짜고짜 너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K의 여자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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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를 만나기 전에도 두 번인가 남자 친구를 사귀어본 적은 있지만 사귀었다고 하기 민망한 정도였다. 누가 사귀자고 하면 무조건 알았다고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지도 않는 애랑 그렇게 만나다가 걔가 뽀뽀하자고 해서 헤어지자고 한 게 다였다. 이렇게 좋아해서, 좋아죽겠어서, 몇 날 며칠 앓다가 만난 건 K가 처음이었다. 이제 막 열다섯이었지만 나는 앞으로 누구도 K만큼 좋아할 수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연애란 걸 해본 적이 없으니 막상 사귀기로 해놓고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사귀기 전에는 K 주위만 맴돌다가 사귀기로 한 다음부터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오히려 K를 피해 다녔다. 한번은 내가 공부하고 있던 독서실로 K가 온다고 했는데 기껏 외출 준비를 다 하고 출발하겠다는 K에게 그냥 다음에 보자고 문자를 했다. 거울을 보니 이 몰골을 보면 K가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K는 크게 화를 내진 않았지만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학원이 끝나면 멀찍이 떨어져서 아주 잠깐 동네를 산책하는 게 전부인 만남을 몇 번 갖다가 수학여행 첫날 밤, 나는 K에게 차였다.

K는 수학여행 가는 날 아침에 함께 등교하기로 해놓고 전날부터 연락이 두절됐다. 그럼에도 K만 보면 여전히 쑥스러워서 화는커녕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됐냐고 묻지도 못했다. ‘헤어지자’ 꼴랑 네 글자의 이별 통보는 자기 위해 숙소 불을 껐을 때 도착했다. 우리 반에 커플이라곤 우리뿐이라서 내 핸드폰 진동이 울리자 방 애들이 K야? K인가 봐,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아직은 체면이 중요해서 나는 최대한 차갑게 ‘응’이라고 답장했다. 남자 방에서도 K 옆에 애들이 몰려 있을 거란 계산에서였다. 그날 애들이 자는 동안 나는 화장실에서 ‘집이었다면, 집에서 차였다면’ 하고 생각하면서 엉엉 울었다. 그럼 엄청 매달렸을 텐데, 하고. 수학여행은 이박 삼일인데 첫날 밤에 헤어지자고 하다니. 앞으로의 여행이 최악인 것보다, 하루빨리 매달리고 싶은 마음에 일분일초가 괴로웠다. 다음 날 아침엔 눈이 떠지지도 않아서 버스 맨 앞자리 창가에 앉았다. K는 신나 보였다. 맨 뒷자리에 앉아서 나만큼 K를 좋아하는 애의 무리와 놀고 있었다. 그렇게 포항제철소에 도착했을 땐 정말이지 용광로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였다.

그 뒤로도 나는 꾸준히 K를 좋아했다. 알고 보니 점잖고 수줍음 많은 줄 알았던 K는 엄청나게 여자를 밝히고 쉽게 질려 하는 애였다. 게다가 이미 상당수의 애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미 K를 좋아하기 시작했고 그 마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K와는 세 번을 만났고, 세 번 다 차였다. 모두 오래가지 못했고, 모두 학교 행사 전날 차였다. 내 전교 석차는 반이 접혀 떨어졌다. 친구들은 모이면 K 욕을 했다. 애들이 뭐라 하건 간에 K만큼 좋은 애는 다신 없을 것 같아서 절망스러웠다. K를 나보다 먼저 좋아하기 시작했으면서 K와 한 번도 사귀어보지 못한 애들을 보며 버티는 날과, 그딴 건 아무 위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날이 번갈아가며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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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내게 다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건, 내가 K의 친구 H와 사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어느 날 H가 문자로 고백을 했다. H는 당시 팬클럽도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인기 있는 애였다. 전교에서 H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다른 학교에서도 H를 보러 올 정도였다. 인터넷 소설이 유행하던 때여서 잘생긴 H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고 K와 H가 속한 무리를 추종하는 애들도 생겼다. 그래도 나한테는 오직 K뿐이었는데, 그 고백을 나 대신 친구가 받아버렸다. 내 핸드폰을 갖고 놀던 친구가 제멋대로 그래, 하고 답장을 보낸 것이다. 안 그래도 K를 싫어했던 친구는 내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너희 이제 1일이야, 하고 말했다. 기겁하고 없던 일로 하자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H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H와 사귀게 되었다. 그런 게 모두 가능했던 나이였다. 친구의 핸드폰을 하루 종일 갖고 노는 것도, 네 번호로 답장이 왔으니 무를 수 없어,라는 오글거리는 말에 사귀게 되는 것도.

며칠 뒤 H와의 비밀 연애가 역시나 내 핸드폰을 갖고 놀던 우리 반 남자애를 통해 삽시간에 소문났다. 다음 쉬는 시간에는 3학년 언니들이 도대체 누구냐며 내 얼굴을 보겠다고 우리 반에 찾아왔다. 그 소란 끝에K 가 물었다. 정말이야? 하고. 그리고 며칠 뒤 K에게 연락이 왔다. 너를 좋아한다고. 너 같은 애는 없을 것 같다고. 하지만 친구의 대리 대답으로 시작한 연애는 의외로 오래갔다. 22일만 만나도 ‘투투’라며 기념하던 때였는데 무려 800일이나 만났다. 모든 게 처음인 숫자들이어서 다들 우리가 결혼할 것 같다고 했다. 열여섯이었으니까. 나는 곧 타지에 있는 전교생 기숙사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자연스럽게 K도 H도 만나기 어려워졌다.

그렇게 삼 년을 보냈다. 고교 시절을 보내면서 남자 보는 눈도 많이 달라져서 K만큼은 아니지만 나를 설레게 하는 사람도 몇 있었다. 누가 수학 문제를 풀어준다거나, 콘센트에 코드를 대신 꽂아준다거나 하면 웃음이 실실 나왔다. 그렇다고 열병을 앓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데 수능을 치르고 나서 몇 번이나 K와 우연히 마주쳤다. 수험생 할인으로 롯데월드에 갔다가 마주치고, 지하철 안에서 마주치고 하는 식이었다. 만나고 싶어서 집 근처를 서성여도 볼 수 없었던 K를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계속 마주치니 신기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K와 손을 잡고 있었다. 여름이었고 스무 살이었다. K가 사귀자고 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K를 보며 마음이 혹했지만, K와 진지하게 만나는 건 너무 무서웠다. 아무래도 결혼은 아닌 것 같은데, K와 제대로 만나면 내 힘으로는 헤어질 자신이 없었다. K의 매력은 엄청나니까. 그래도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별하지 못하는 K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 K를 만나지 않은 시간 동안 나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진정시킨 마음인데 다시 열병이 날까 두려워서 그 뒤로 나는K 를 멀리했다.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그때의 선택을 후회했다. 본가에 내려올 때마다 친구들을 만나면 K와도 한 번씩 마주치곤 했는데, 애인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K는 그때까지도 애들 사이에서 돋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면 결혼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 어리석음으로 K와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했다고 생각하니 어린 날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결혼은 무슨 결혼. 그때 K를 만났더라면 우리는 뜨겁게 연애하고 진즉에 헤어졌겠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빨리 헤어졌을지도 모르고. 그해 나는 K를 거절하고 기숙사 앞에서 공개 고백했던 동기를 잠깐 만났는데 모든 게 해로운 연애였다. 그때 걔를 만날 거였으면 차라리 K를 만나볼걸, 하고 후회할 때마다 친구들은 아니야, 그랬으면 대학 졸업도 못 하고 독박 육아 하고 있을지도 몰라, 하고 말했다. 아주 틀린 말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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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17년 초였다.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잔뜩 받아 본가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K를 만났다. 의사 선생님은 절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지만 집에서는 마음 놓고 울 수 없어서 나를 염려하는 친구들에게 술을 마시자고 했다. 울면서 술을 마시다 취했고 취해서도 울고 있었는데 K가 들어왔다. 좁은 동네다 보니 술 마시는 곳이 거기서 거기고, 친구들도 그 애들이 그 애들이어서 마침 술 마시러 온 K네 애들과 자리를 합쳤다. K가 오고 나서도 나는 계속 울었다. K가 보든 말든, 얼굴이야 엉망이 되든 말든. 그런 건 이제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K와 나, 친구 한 명만 남았을 때 나는 충동적으로 친구한테 집에 가라고 했다. 우리 집 바로 앞에 사는 충은 그때까지 나를 챙기겠다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당황한 얼굴로 나 정말 가? 하고 묻는 충에게 나는 응, 나 얘랑 둘이 할 얘기가 있어,라고 했다. 충이 가고 K와 나는 어릴 때 솔직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나는 노골적으로 K의 손을 잡고 팔짱을 꼈다. K는 걷다 말고 나를 안더니 연애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이게 우리한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말이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었다. K는 순진하구나, 정말 하나도 모르는구나. 나는 대답 대신 집에 갈게,라고 했다. K는 잔뜩 실망한 얼굴로 오늘 같이 있으면 안 되냐고 물었다. 진부한 게 웃겨서 또 웃어버렸더니 K는 다시 나를 안았다. 낯선 품이 간절했던 터라 밀어내지 않고 한동안 K에게 기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지. 둘만 남으면 K는 나를 안아줄 줄 알았지. K는 나랑 자고 싶어 하니까, 생각하면서. K의 품은 따듯했지만 그게 어떤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집에 가면 그 온도가 조금도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나는 내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지금 통과하는 시간이 긴 터널이 아니라 깊은 동굴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고 점점 더 깊이 걸어 들어가는 나를 멈출 수 없어서 다리가 없었으면, 생각을 할 줄 몰랐으면, 피가 흐르지 않고 체온이 식고 감정이 메말랐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연애라니. 재밌다, K야. 재밌다, 재밌어.

나는 택시를 탔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네 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아침에는 전날 함께 술을 마셨던 충과 냉자로부터 번갈아가며 전화가 왔다. 미친년아 어디야? 하고 묻는 애들에게 집이야, 하고 몇 번이나 확인을 시켜줬다. 그 뒤로도 친구들은 심심할 때마다 정말 K랑 한 번도 자지 않았냐고 물었다. 응, K랑은 안 잤어, 대답하면서 그런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까짓거 한 번 잘 수도 있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마음 내키면 한 번이 뭐야. 두 번, 세 번도 문제없지. 하지만 내키지 않으니까. 쉽게 설렜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다짜고짜 너 예쁘다, 하는 말에는 화가 나는 사람이 되었고, 꽃이 피는 것에도, 하늘이 파란 것에조차 분노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번 그렇게 되어버린 이상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서 아직도 간지러운 말을 할 줄 아는 K에게 나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사랑은 정신병이라고 생각하는 나와 여전히 운명을 믿는 K 사이에 이제 도무지 교집합이랄 게 없었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인사 같은 것도 술이 깨면 하지 못할 거란 걸 알고 있어서 나는 K를 잘 봉인하기로 했다. 그건 생각보다 훨씬 간단한 일이었다. 그래도 간간이 K의 소식이 들려오면 귀를 쫑긋하게 된다. K가 나이트클럽에서 여자를 만난 이야기와, K가 피시방에서 밤을 새운 이야기, K가 연애 중이라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 너무 여전해서 그 여전함이 낯설고 반갑다. K가 별 탈 없이 여전했으면. 건강하게, 나와 무관한 시간을 살아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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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진선

그림: 한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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