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았다. 티저 영상을 보자마자 끌렸는데, 어쩐지 한밤중에 조용히 봐야 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래서 심야 영화를 예매했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잘 수 있도록 씻고 집을 나섰다. 영화는 예상했던 대로 잔잔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영상으로 가득해서 영화가 끝났을 때에는 엄마 집에서 오랜 휴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영화관을 나오면서 함께 영화를 본 J가 왜 그렇게 울어, 하고 말했다. 나는 눈물이 헤프고 어지간한 클리셰에도 쉽게 오열하는 사람이라서 영화를 보고 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내 딴엔 티 나지 않게 울었다고 생각해서 내가? 하고 물었다. J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응, 많이 울더라, 하고 말했다. 운 건 맞는데 그렇게까지 울었나. 나는 내가 울었던 장면과 공감했던 대사를 J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나도 저렇게 엄마가 쪽지만 남겨두고 떠났었거든. 다시 돌아온다고 했고 정말로 돌아오긴 했지만. 그냥 그때 생각이 나더라, 하고. 그런데 있지, 한번은 엄마가 나 때문에 돌아왔었어. 그러다 죽을 뻔했지. 이게 다 고모 때문인데, 그래서 “고모는 고모다. 이모가 아니라”라는 대사가 제일 공감됐어. J는 아이고, 그랬구나, 하며 운전을 계속했다.
집에 도착하니 세 시가 넘었고, 나는 바로 침대에 누웠다. 누운 채로 고모는 이모가 아니라는 말을 계속 곱씹었다. 내게는 고모가 셋 있었는데, 그중 둘째 고모는 엄마를 몰래 만날 수 있게 도와주곤 했다. 고모가 다른 어른들에게 고모를 만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주면 그 시간 동안 엄마가 나를 만나러 왔다. 그런 날에는 오랜만에 엄마를 실컷 만져볼 수 있었고 엄마와 만난 것을 들켜서 매 맞을 일도 없었다. 그날도 엄마가 학교로 몰래 찾아와서 학교를 땡땡이치고 놀다가 저녁에 고모네로 갔다. 엄마와 고모가 얼마간 이야기를 나눈 뒤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엄마는 다시 떠났다. 그날 고모는 내가 함께 살고 싶다고 하면 엄마가 돌아올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건 너무 솔깃한 말이어서 나는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다가 어린이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불쑥 나타나 소원을 묻는 엄마에게 고모가 알려준 대로 대답했다. 내 소원은 엄마랑 아빠랑 함께 사는 거라고. 엄마랑 헤어지기 싫다고. 다른 선물은 필요 없다고. 엄마는 나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정말 돌아왔다. 나는 마냥 행복했다. 나중에야 엄마가 나 때문에 지옥 불로 다시 걸어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걸 알았을 때는 후회해도 아무 소용없었다. 엄마가 이유 없이 매를 맞고 숨이 끊기기 직전까지 넥타이에 목이 묶여 끌려 다니는 동안 나는 자고 있었다. 그전부터 이미 몇 달간 엄마는 아빠가 들어올까 봐 안에서 이중으로 잠금장치를 걸어두고 우리 방에서 지냈다. 우리는 밤새 방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고 발로 차는 소리를 들으며 서로를 부둥켜안았고, 낮이 되어 문을 열어보면 어김없이 찍고 부수려 했던 자국이 문 바깥쪽에 남아 있었다.
그날도 엄마가 이불을 덮어주고 재워줬는데 어째서인지 일어났을 땐 엄마가 없었다. 동생도 없고 아빠도 없던 그날 아침, 식탁에 놓인 토스트를 사 먹으라는 짧은 메모와 이천 원을 보고 다시 엄마가 떠났음을 직감했지만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외가댁 근처의 병원에서 목과 팔에 깁스를 한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엄마는 검게 부은 얼굴로 다 나으면 나도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하루 종일 엄마 곁에 있는 동생이 부러운 마음뿐이었다. 학교 때문에 집으로 돌아와 혼자 며칠을 보내고 나서야 엄마가 저렇게 된 것이 나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옭아맸다. 엄마는 퇴원하자마자 정말 나를 데리러 왔고 내 탓은커녕 미안해하기만 했는데도 나는 종종 나 때문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모는 고모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엄마의 편의를 봐주는 고모였어도 고모는 고모여서 엄마가 다시 맞고 지낼지도 모르는 상황보다 아빠가 혼자 지내는 것이 더 안타까웠을 거라고. 고모가 이모였어도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여자 형제가 없는 엄마는 늘 외롭다는 말을 했고, 나와 동생이 부럽다고 했다. 만약 이모가 있었더라면, 엄마는 덜 아플 수 있었을까.
그런데 나는 왜 이 영화를 엄마와 함께 보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비슷한 점이라고는 고작 그 두 가지가 전부이고 그마저도 맥락은 아예 달랐는데. 다시 이 생각을 했던 건 이번 설 연휴 때였다. 동생이 출장을 가서 엄마와 둘이 보냈는데 엄마는 내내 집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난봄 짓기 시작한 엄마의 집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예산이 턱없이 부족해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지은 집의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이건 원래 어떻게 했어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 이렇게 했다는 둥의 말과 그래도 이건 정말 좋지 않아?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 <리틀 포레스트>의 목가적인 장면이 생각났다. 아마도 그때 엄마가 꿈꾸는 삶이 저런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문소리를 보며 우리 엄마도 저렇게 사랑했던 기억이 있었으면 좋겠고, 담배도 피울 줄 알았으면 좋겠고,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았을 때 그게 이런 뜻이었구나, 할 수 있는 엄마만의 철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엄마가 외롭지 않을 수 있게 엄마의 마음속에 자식과 돈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설 특선 영화로 <리틀 포레스트>가 방영되는 것이었다. 엄마 이거 봤어? 하고 물으니 엄마는 관심 없다는 듯이 어, 너 보고 싶으면 봐, 하고 불을 껐다. 류준열에게 엄마가 감자빵 레시피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김태리를 보다가 나는 선풍기를 안고 전기장판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엄마는 자고 있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얼굴이 빨개지며 열 올라, 열 올라, 하고 선풍기를 켜는 엄마는 곧 춥다며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금방 지나갈 거라 생각했던 갱년기 증상이 몇 년째 차도 없이 엄마를 괴롭히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영화를 거의 보지 못하고 텔레비전을 껐다. 그 상태로 거실에서 함께 자기로 했다. 곧 잠든 엄마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엄마가 깰까 봐 뒤척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느라 거의 자지 못했다.
다음 날 우리는 집 앞 산책을 하며 동네 구경을 했다. 집 앞에 마을회관과 분교가 있었고, 사방에 과수원이 있었다. 닭과 개가 많았고 버스를 타려면 이십오 분을 걸어 나가야 했다. 이런 곳에 집을 짓는데도 일흔까지 일해야 하는 건가? 쉰까지만 일하겠다고 선언했던 엄마는 벌써 쉰을 훌쩍 넘겼고 집을 지으면서 그 기한은 일흔이 되었는데, 요즘의 엄마를 보면 정말 일흔까지 일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내게 엄마는 얼른 네가 대박이 터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건 꿈도 꾸지 말라고, 희망을 버리면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엄마는 내게 건 기대를 놓지 않는다. 엄마가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도 나보다 더 잘 벌 것 같은데. 작가는 되기도 어려울뿐더러 된다 해도 유명해지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자꾸만 대박을 외치는 건지. 못 들은 척 포기해, 하고 말하면 엄마는 안 돼, 절대 포기 못해,라고 대답한다. 그럴 때면 나는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저녁에는 근처에 있다는 라이브 카페에 들렀다. 차도에 위치한 개여울은 모든 것을 비싸게 팔았다. 외식도 거의 하지 않는 엄마는 이 동네에 이런 근사한 곳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며 나를 그곳에 데려갔다. 그리고 유자차를 주문하더니 내가 생강차를 주문하자 너도 유자차를 마시지, 하고 말했다. 완강하게 싫다고 하자 엄마는 키위 스무디로 주문을 바꿨다. 자리에 앉아 생강차는 집에서도 마실 수 있다고 속삭이는걸 보고서야 아마도 같은 가격의 유자차보다는 키위 스무디가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구나 싶었다.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엄마는 너도 한번 나가서 연주해봐, 하고 말했다. 피아노는 그만둔 지 이십 년이 다 되어가고 기타는 배운 지 일 년이 조금 지났는데 내가 들어도 형편없는 연주를 두고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다고 했다. 정작 집에서 연주를 들려주겠다고 하면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면서 왜 그러는 걸까. 그러고는 너는 글도 쓰고 피아노도 치고 기타도 치는데 왜 노래를 만들지 않느냐고 했다. 대박 노래를 만들어서 엄마 돈 좀 주라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내가 얼마를 벌어야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나는 엄마를 만족시킬 자신이 없었다. 엄마의 가장 큰 자부가 우리를 포기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엄마 자신으로부터 기인했다면 어땠을까. 나한테 쓸 돈을 엄마한테 썼으면 엄마는 이렇게 가난하지도 외롭지도 않았겠지. 엄마는 개여울을 나오면서 라이브 카페라더니 노래는 한 곡도 안 하네, 하고 구시렁거렸다. 집에도 있는 차를 비싸게 마시고 돌아와서는 맥주를 마시며 다시 텔레비전을 보았다. 육아 프로그램에 나오는 아이들을 넋 놓고 보고 있으니 그렇게 예쁘냐고 엄마가 물었다. 응, 너무 예뻐, 하면서도 나는 절대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엄마처럼 할 자신이 없는데, 그럼에도 엄마처럼 될까 봐 무서웠다. 나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가 생기는 상상은 언제나 두려워서 그런 사랑이라면 영영 모르고 싶었다. 엄마는 여전히 얼굴이 빨개졌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선풍기를 엄마 쪽으로 틀어줬다 껐다 하면서 엄마가 나를 놓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오랜만에 만난 엄마에게 차비를 받고, 여행 자금을 도와달라 하고, 엄마가 더 많이 벌어서 내가 일하지 않고도 먹고살기를 바랐다. 내가 없었으면 엄마의 삶은 더 윤택했겠지 싶은 마음과 그래도 엄마가 좀 더 버텼으면 하는 마음이 어지럽게 섞였다. 가만히 누워 있던 엄마가 느닷없이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마, 하고 말했다. 응, 하고 대답하면서 내일은 정말 서울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