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동생과 새벽 목욕탕에 다녀왔다. 추위와 미세먼지 때문에 겨울이 되고부터 우리는 목욕탕에 가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고 다녔다. 그게 벌써 몇 달 전인데 공연 업계에서 일하는 동생과 연말에 시간을 맞추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며칠간 이어진 철야 작업 중 잠깐 집에 들르는 날에도 동생은 피곤에 절어 잠들어 있었다. 나는 동생과 아무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고 밥이라도 먹이고 싶어서 동생이 깨기를 기다리다가 옆에서 불편한 자세로 잠들곤 했다. 잠에서 깨면 어느새 동생은 다시 나가고 없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서로의 생리 기간이 맞지 않아 우리는 함께 씻는 일을 또 미뤄야 했다. 그러다가 지난 주말, 동생이 오랜만에 출근하지 않았고 내 선약이 취소되면서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목욕탕에 가기로 했다.
상상마당 앞에서 만난 동생은 나를 보자마자 살갑게 팔짱을 끼워왔다. 그리고 보너스를 받았으니 비싼 밥을 사주겠다고 했다. 동생의 턱없이 적은 월급을 알고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동생이 고맙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보너스도 비싼 밥 한 번이면 다 써버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내가 사줄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언제부터 얘가 이렇게 어른이 된 걸까, 생각하며 동생이 좋아하는 표정으로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밥과 술을 배불리 먹고 상수동에서 성산동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춥지만 오랜만에 배 아프게 웃었고, 조금 지쳐서 웃는 것도 힘들어졌을 즈음 집에 도착했다. 게으른 내가 눕기부터 하자 동생이 주먹으로 내 엉덩이를 치면서 지금 누우면 오늘도 망하는 거라며 얼른 일어나라고 했다. 겨우 짐을 챙겨 나오면서도 이렇게 피곤해서 때를 밀 수나 있을까 싶었지만 막상 탕 안에 들어가니 역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꽁꽁 언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세신 가격표를 보며 누가 대신 나 좀 씻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릴 땐 싫다고 해도 엄마가 다 씻겨줬는데. 우리는 간지럼을 많이 타서 목욕탕에 갈 때마다 엄마한테 매를 맞았던 기억을 소환했다. 나는 발바닥 근처를 건드리면 다리가 제멋대로 움직여 엄마를 찼고, 동생은 나보다 심해서 배에 손만 대도 자지러졌는데 엄마는 그런 애들을 둘이나 씻기고 자기 몸도 씻어야 했으니까. 힘들었겠지. 엄청 힘들었겠지. 그래도 엄마가 씻겨줄 때가 좋았는데, 하니 동생은 “언제까지 엄마를 부려먹고 살래?” 했고,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이라고 했다. 동생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그럴 때면 안 그래도 엄마 얼굴을 똑 닮은 동생이 더 엄마 같았다.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도, 먼 길을 걸어오면서도 쉴 새 없이 떠들었는데 몸을 불리고 때를 밀면서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동생과 단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동생이 짓는 표정이나 말투, 호탕한 웃음소리를 좋아한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 동생이 건강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생은 어릴 때에도 또래보다 컸지만 지금처럼 당찬 아이는 아니었다. 누가 말을 걸기만 해도 울었고, 때리면 맞았다. 엄마는 우리에게 “엄마가 없으면 언니가 엄마”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 동생을 괴롭히면 배로 갚아줘야 했다. 커다란 동생이 울면서 찾아오면 왜소한 나는 속으로 동생을 괴롭힌 애가 나보다 클까 봐 걱정하면서 동생네 교실로 향했다. 동생을 한 대 때린 애는 열 대를 때려줬고, 고의로 동생의 연필을 부러뜨린 애한테는 필통을 통째로 박살 내는 것으로 복수해줬다. 동생을 괴롭힌 애들이 엉엉 울면 이제 됐다 싶은 마음으로 새로 터득한 욕들을 최대한 상스럽게 뱉고 돌아왔다. 그러다가 동생 반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 가 일 년간 동생네 교실 청소를 한 적도 있다.
동생과 사이가 틀어진 건 그 뒤의 일이다. 동생이 중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 방학에 엄마는 소심한 동생이 자기주장을 하면서 살도 빼길 바라는 마음으로 검도 도장에 보냈는데, 정말 검도에 그런 효과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즈음 그냥 그렇게 될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동생은 정말로 말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게 되어서 더 이상 내가 지켜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자연스럽게 동생은 친구도 많아졌고, 우리는 각자의 친구들과 노느라 함께 지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엄마가 없을 땐 언니가 엄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핑계로 고작 두 살 많은 권력을 휘둘러 아무 때나 동생을 때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과 싸우다가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졌는데, 허리띠를 빼지 않은 옷이어서 버클이 정확하게 동생 머리를 가격했다. 순간 아차 싶어 괜찮아? 하고 물었더니 동생이 서럽게 울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내가 던진 옷에서 허리띠를 뺐다. 앉은 채로 뒷걸음을 치며 미안하다고 했지만 동생은 “너도 한번 당해봐” 하면서 버클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나는 뒤통수가 찢어져 피가 났고 무섭고 쪽팔린 마음에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밖에선 나를 편애하는 할머니가 저년이 제 언니를 잡아먹는다며 동생을 잡았고, 억울한 동생이 “나도 맞았단 말이야” 하며 울고 있었다. 그 모든 걸 들으며 피가 좀 더 나기를, 그래서 퇴근한 엄마도 보고 동생이 죽도록 혼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피는 금방 굳어 딱지가 앉았고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서 밖으로 나갔을 땐 함께 죽도록 맞았다. 그래도 이 사건 이후로는 동생을 때리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싸움으로는 동생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동생은 아직도 이 사건을 종종 이야기한다. 언니가 그 뒤로 나를 때리지 않았다고, 언니가 나를 정말 많이 때렸다고, 진짜 못되게 굴었다고. 이제는 그날이 안줏거리가 되어서 친구들을 만나거나 함께 술을 마시면 꺼내곤 하는데, 동생은 내가 동생을 때리지 않게 된 이유를 우리 둘 다 기억하는 게 재미있고 신기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생은 어릴 때를 거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상하게 어릴 때 일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동생이 그런 말을 천진난만하게 해서 나는 슬프게 안심한다. 동생이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은 ‘엄마가 없을 땐 언니가 엄마’라는 말이 왜곡되어 사용되기 전인데, 겨우 다섯 살이던 동생이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기억들이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었다가 함께 고아원 입구까지 끌려간 일이나, 엄마를 찾아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어 캄캄한 길 위에서 부둥켜안고 울던 기억. 그리고 집에 잡혀 와 매를 맞던 기억. 그때 내게 제일 큰 공포는 동생과 떨어지는 것이었다. 엄마가 없을 땐 내가 엄마랬는데. 엄마가 다시 우리를 데리러 왔을 때 동생을 지키지 못해 영영 잃어버릴까 봐 언제나 두려웠다. 그래서 그즈음 나의 일기에는 내가 어떻게 해서 동생이 웃었다는 이야기가 강박적으로 들어가 있었다. 나는 안 먹고 동생에게만 떡꼬치를 사줬다는 내용이나, 많이 걸어서 다리가 아픈 동생을 업고 왔다는 내용을 봤을 땐 동생이 잘해준 건 기억하지 못하고 때린 것만 기억하는 것이 서운하다가도 역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동생이 언제부터 나를 돌보기 시작한 걸까. 몸을 동그랗게 말고 동생에게 등을 맡긴 채 생각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동생이 이렇게 어른스러워진 것일까. 그런 생각 끝엔 언제나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던 내가 있었다. 그리고 해외 출장지에서 매일 연락을 걸어오던 동생과, 독감 치료도 거부하고 앓던 나를 간호했던 동생과, 언니가 죽을까 봐 무섭다고 했던 동생과, 넌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지? 내가 정신병자라고 생각하지? 하고 동생을 자극했을 때, 눈물을 왈칵 쏟으며 언니를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정말이야,라고 했던 동생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몸을 헹구면서 동생은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다녀와,라고 했다. 동생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얼마나 필요한데? 하고 물으니 적어도 오백만 원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동생에게 엄마에게 빌리라고 했다. 동생이 엄마 돈 없어,라기에 이제 내가 양아치 짓 덜할 테니 네가 하라고 했다. 동생은 이번에도 한심한 표정을 지었고, 그럴 땐 정말 엄마 같았다.
글: 이진선
그림: 한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