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기가 다가올 즈음 의식적으로 차분해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미 불안의 징조임을 알고 있었다. 나와 동생은 함께 살 때보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시월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서로의 기분을 더 예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복이의 첫 기일을 앞두고 어찌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로 동생의 물음에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괜찮다고 말하는 동생이 언제나 걱정되었다.
우리의 상황은 사고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각자 살게 되었고, 내 경우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퇴근 후에는 다니던 신경정신의학과에서 상담을 받았다. 주로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는데, 시월부터는 역시 복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이제 눈물은 나지 않는다고 굳이 덧붙였다. 선생님은 계속 이야기해 보라고 했고, 나는 나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평생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런데 모두가 나를 용서하는 걸 넘어서 걱정해 준다고. 그러자 선생님은 상담실 구석을 가리키며 “저기 자기 실수로 개를 잃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하고 말했다. 나는 그곳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이어 말했다. “이제 그 사람을 비난해 보세요. 당신 때문이라고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못하겠어요. 그 사람 잘못이 아닌걸요. 사고잖아요.” 의사 선생님은 안경을 고쳐 쓰고 바로 앉더니 “맞아요. 사고일 뿐이에요.” 하고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라고.
그러나 눈물이 났던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나는 그곳에 나도 앉혀보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사람이 그의 개를 잃었다면 진심으로 사고였잖아요, 하고 한참을 안아주었을 것이다. 등을 쓸어주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함께 울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앉아있었다면. 복이를 지키지 못한 내가 앉아있다면. 흠씬 뺨을 때리고 싶었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이야기는 끝내 하지 않았다.
시간은 성실해서 기어코 1주기는 오고야 말았고, 동생은 처음부터 남의 집이었던 것처럼 ‘우리 집’이었던 집을 두고, ‘언니 집’에 가서 아기 밥만 두고 오겠다고 했다. 그게 못내 서운해서 나는 오늘은 같이 자자며 어리광을 부렸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었다. 동생이 싸 온 군고구마를 아기 밥그릇에 올려놓고 우리는 나란히 누웠다. 셋이 잠들던 아득한 날들처럼 나는 엉덩이를 뒤로 조금 빼 복이가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낮게 동생의 숨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