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와 지내는 동안 나는 대부분 학생―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이었다. 그중 마지막 4년은 졸업을 하지 못해 석사 수료생 신분으로 지냈다. 주위에서는 빨리 직장을 구하라고 압박했지만, ‘수료’라는 단어가 ‘실패’를 의미하는 것 같아 어떻게든 졸업은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하루를 살아내는 것도 버거울 만큼 아팠다. 논문은커녕 일기도 쓸 수 없었다.
그렇게나 아팠던 이유는 모두 사람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고도 오랫동안 미련을 놓지 못했다. 그런 나를 걱정하는 안부에 일일이 대답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만남은 더욱 어려웠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는 고개만 끄덕이다 왔다. 거절에는 힘이 필요하니까. 내가 하는 말은 대부분 ‘그래’, ‘좋아’, ‘나도’ 같은 것들이었다. 웃으면서 할 수 있는 말들. 힘이 많이 들지 않는 말들. 하지만 힘을 빼도 만남은 그 자체로 버거웠다.
그런 날에는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내가 누우면 복이는 몸을 말고 어느 방향에서든 몸을 맞댔다. 서로에게 기댄 채로 게으름을 피우다 보면 조금 움직일 힘이 생겼고, 그 힘으로 함께 공원에 나갔다. 산책을 하다 보면 복이한테는 잘도 고개를 저었다. 거긴 안돼. 그거 먹으면 안 돼. 큰 개한테 까불면 안 돼. 그게 웃겨서 혼자 흐흥 웃는 날도 있었다. 진짜로 웃게 만드는 건 복이 뿐이구나, 힘들지 않고도 웃을 수 있구나, 하면서.
나는 내가 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모두 타버린 상태. 더는 아무것도 태울 수 없는 상태.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낯선 나라의 전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상태가 되자 되려 움직일 힘이 생겼다. 너무 오래 멈춰 있던 탓에 무언가를 시작하는 데 많은 힘이 필요했지만, 안 쓰던 기계에 기름칠한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웹 플랫폼에 에세이도 연재했다. 막상 움직이기 시작하니 점점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8개월 후 무사히 졸업과 연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복이의 사고가 있었다. 가장 확실한 사랑이 눈앞에서 떠났다. 내 부주의로.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했고 누워있어도 자꾸만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계절은 빠르게 겨울로 접어들었다. 나는 다시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누워있어도 기대 오는 체온이 없어 회복하기가 어려웠다.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했지만 8개월 동안 열심히 살았던 탓으로 그 겨울엔 전보다 많은 만남이 있었다. 여전히 거절에 취약했던 나는 대부분 부르는 대로 가서 시간을 버티다 들어오곤 했다.
그날은 A의 생일이었다. A는 생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동생이 데려온 강아지를 임시보호하던 중이어서 나는 집을 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A가 퇴근한 뒤 친구들 모두 우리 집에서 만나자고 막연하게 정했다.
전날 오전, 단체 채팅방에서는 평소처럼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갔다, 빠른 대화에 좀처럼 낄 수 없던 나는 핑계를 대고 침대에 누웠다. 그날도 반복되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복이는 자꾸만 사고를 당했다.
다음 날 오후, 언제 즈음 출발하는지 물어보려 하는데 핸드폰이 꺼져있었다. 충전 후 쌓인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부분 평소 나누던 수다였고, 마지막으로 “진선은 왜 아무 말이 없지?” 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A님이 나갔습니다.
채팅방으로 초대하기
나는 A가 채팅방을 나갔다는 알림을 보며 깊게 한숨을 쉬었다. 화가 났구나. A의 퇴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다. 피로가 몰려왔지만, 일단은 A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 서운함을 외면하고 상황설명과 함께 사과 메시지를 보냈다. 이따 보자고. 그러나 돌아온 건 차가운 말이었다. 너를 버린 사람이 너를 왜 버렸는지 알겠다는 말. 그 말을 끝으로 A는 나를 차단했다.
평소였으면 그래도 사과했을 것이다. 받아줄 때까지 미안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다 정말 미안해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나에겐 복이가 없는데, 그걸 아는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지? 순간,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나는 번호를 바꿔가며 끈질기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동안 지키려고 애썼던 A의 연약한 부분을 공격하면서. A는 답장하고 차단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답장이 오지 않을 때까지 집요하게 공격했다.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는 개운하기까지 했다.
한편 채팅방에 있던 친구 중 B에게는 유독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 몇 해 전, B가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앞으로 B에게는 뭐든 져주기로 다짐했다. B는 아플 테니까. 아프기만 해도 모자랄 테니까. 그때 B는 평생 마음을 갚으며 살겠다고 했다. 그렇다고 무얼 바란 적은 없었다. 다만 B라면 내 슬픔도 공감해 줄 거라고 믿었다. 막 복이를 잃은 나를 누구보다 이해해 줄 거라고. 그러나 B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다음날 나는 B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A와 있었던 일을 하소연했다. B는 하품하면서 말했다. 자기는 아직도 술이 안 깨는 것 같은데 A는 기력도 좋다고. 싸울 힘도 있고. 기가 차서 눈물이 났다. 나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적어도 연락은 해보고 화를 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나였으면 걱정부터 했을 거라고. B는 정색하고 말했다. 사과할 땐 ‘나였으면’이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들에게 나는 사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 뒤로도 B는 이따금 다정한 사이처럼 굴었다. 다른 친구들도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는 B가 눈꼴사나웠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B와도 관계를 끊기로 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나더라도 어색하게 인사할 일 따위 없도록 확실하게. 그래서 평소 B가 나에게만 말했던 타인의 험담을 주변에 퍼트렸다. 곧 B로부터 과격한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고, 그제야 뭔가 소화되는 기분이었다.
떳떳하지 못한 방식이었지만 나는 처음으로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했다. 눈치 보지 않고 관계를 끊었다. 그렇게 오랜 친구 둘을 잃었다.
그 후 긴 시간 외로웠다. 어쨌든 둘은 오랫동안 내 삶의 지분을 차지했던 사람들이니까. 그 역할은 그 애들만 해줄 수 있던 거니까. 그래도 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아프길 바랐다. 그 일로 몇몇 친구를 더 잃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하지만 내가 한 선택 중 가장 기특한 선택이라고 말해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더 빨리했어야 한다고, 너한테 그런 힘이 있을 줄 몰랐다고. 나는, 복이 덕분이라고 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나는 전보다 단단해졌다. 여전히 쉽게 울고 감정이 너울대는 날도 많지만, 울면서도 억울한 건 말할 수 있게 됐고, 싫은 사람은 무시할 수 있게 됐다. 복이가 보고 있을까? 스스로도 낯설 만큼 씩씩한 날에는 복이가 어떤 힘으로 내 안에 존재하는 것 같다. 체온을 나눴듯이 단호한 성격과 뻔뻔함도 나눠주고 있는 건가, 하고. 변한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상관없다. 안 돼요, 싫어요, 불쾌해요, 하고 말하는 힘은 복이 없는 세상에서도 내가 회복할 수 있게 해 준다. 복이가 내게 준 선물이다.
글: 이진선
그림: 한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