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실에서 안내 말씀드립니다. 지하주차장에 멧돼지가 출몰하였으니 입주민 여러분은 안전을 위해 실내에 계시길 당부드립니다.
다시 한번 안내합니다. 지하주차장에 멧돼지가 출몰하였으니 안전을 위해 실내에 계시길 당부드립니다.”
집 근처에 멧돼지가 출몰했다고 재난 문자가 온 지 20분이 지난 오전 열 시쯤이었다. 재난 문자가 올 즈음만 해도 사방이 다 큰 도로인 거기 어떻게 갔을까 궁금해하며 ‘멧돼지가 잘 돌아갔으면 좋겠다.’ 했는데 거기서 다시 8차선 도로를 건너 우리 집까지 내려온 것이다.
한 시간쯤 지나 다시 관리실에서 안내 방송을 했다. “멧돼지가 뒷산으로 올라갔으니 입주민 여러분은 이제 실내에서 나오셔도 됩니다.”
학교에서 온 아이들이 신발을 벗자마자 난리다. “엄마 이제 산책로 가면 안 돼. 멧돼지 거기로 갔데. 이제 학교도 산책로로 가면 안 된대. 엄마도 절대 가지 마” 산책로에서 운동을 즐기는 엄마가 행여나 멧돼지에 들이 받힐까 봐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난다.
올해 초 출석하는 작은 교회에서 멧돼지 대책회의를 했다. 우리 교회는 치악산 아래에 있는 작은 교회다. 겨울에 눈이 오면 고라니며 꿩이 뒷마당에 오고, 길고양이들 먹으라고 놓아둔 먹이를 너구리가 와서 다 먹기도 하는 그런 곳이다. 재작년에는 고라니가 옥수수며 콩을 다 따먹더니, 작년에는 멧돼지까지 내려와 고구마, 땅콩도 다 파먹었다.
올해는 멧돼지가 4월 초에 잡초가 자라지 말라고 씌워둔 비닐도 다 뜯어놓았다. 밭 한쪽 구석에 거름이 되라고 땅에 묻어두었던 음식 냄새를 맡고 판 건지 깊이가 1미터는 넘는 구덩이도 파두었다. 구덩이 속에 묻어두었던 음식물은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구덩이 파는 솜씨는 얼마나 좋던지. 어차피 땅을 팔 거면 차라리 비닐 씌우기 전에 땅 고르고 돌 골라낼 때 와서 저렇게 파두지 눈치도 여간 없는 게 아니다.
올해 작물도 멧돼지 먹이로 헌납하게 될까 싶어 대책회의가 열렸다. ‘멧돼지가 먹고 혼쭐이 나게 청양고추를 밭에 울타리 삼아 빙 둘러 심자! 멧돼지가 싫어한다는 감자만 심자! 개를 키우자!’ 결국 실현된 것은 하나도 없고 동물들이 싫어한다는 토마토와 고추, 깻잎, 팥만 조금 심었다. (고라니가 팥을 다 끊어 먹었다.) 그렇게 얄미운 멧돼지 건만 도심 한복판에 나와서 저렇게 쫓긴다는 소식을 들으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산에 그렇게 먹을 것이 없어서 두 마리나 도심까지 내려온 건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와 옆 아파트는 6년 전쯤 논과 밭을 밀고 지어졌다. 아파트 뒤 언덕은 공원지구로 묶여 있어 아직은 개발되지 않은 야산으로 남아있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경계에는 아직 토지 수용이 안 된 배밭 하나와 텃밭 몇 개가 남아있었다. 한쪽으로는 아파트와 상가 건물들이, 다른 한쪽은 야산이 산책로를 경계로 나뉘어 있다. 아이들은 그 산책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가고, 어른들은 조깅을 하거나 걷고 강아지를 산책시킨다.
시월 즈음의 어느 날 아침의 일이다. 7시 되지 않았는데 윙윙~ 기계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하고 창밖을 보니 사람들이 나무를 자르고 있었다. 그날부터 집 방충망에는 작은 벌레들이 다닥다닥 붙기 시작했다. 무당벌레며 하늘소며, 나무에서 쫓겨난 벌레들은 쉴 곳을 찾아 방충망에 붙었고, 거미들은 잔치가 열렸구나 하고 난간에 거미줄을 쳐 날벌레들을 잡았다. 야산의 나무는 겨우 2주 만에 모두 잘려나갔다. 나무가 잘려나간 그곳은 황토색 벌거숭이 모래밭에 불과했다. 나무를 자른 후로는 포클레인과 트럭이 흙을 고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야산 뒤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보이는 것은 흙과 아파트와 허공이었다. 나무가 잘려나간 자리에는 아파트를 짓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파트를 짓는 조건으로 시민을 위한 공원을 만든다고 한다. 한참 나무를 자를 때 아이들은 학교 가는 길에 다리가 다친 너구리를 봤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그 산에도 너구리가 살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산을 깎는 사람들이 고라니를 잡는 것도 봤다고 했다. 그 산으로 도망간 멧돼지는 어디로 갔을까? ‘아파트도 더 지어지고 공원이 생긴다니 아파트값이 오르는 거 아니야?’라는 부끄러운 마음 한구석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그 산에 살았던 너구리와 고라니와 멧돼지를, 이름 모를 벌레들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은 7살부터 사슴벌레 덕후가 되어 아직도 사슴벌레를 키우고 있다. 덕분에 나는 사슴벌레 알을 받아서 애지중지 흙도 갈아주고 먹이도 주고 온도 습도도 맞춰주기를 아들과 함께 6년을 하고 있다. 벌레를 싫어하던 나에게 벌레의 아름다움을 알려준 것은 아들과 아들이 키우는 사슴벌레들 덕이다. 갓 부화한 반짝이는 등껍질을 보면 보석같이 아름답다. 흙에 습도가 너무 높아 날파리가 꾀면 내 몸이 다 간지러운 것 같다. 여름에 닫혀있는 사육통 안 온도가 올라가면 에어컨 앞에 두고 환기도 시켜준다. 근친교배를 막기 위해 때때로 암컷이나 수컷을 다시 구해 사육한다. 한 해가 지나 알이 성충이 되고 알을 받으면 참나무 숲에 풀어준다. 숲에서 잘 지내길 바라며. 집 옆의 산에서 사슴벌레를 자주 볼 수 있는 데에는 아마도 우리 아들의 덕도 있겠지. 그런데 이제 그 산에는 나무가 없다. 사슴벌레가 살 곳도 동물들이 살 곳도 없다.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는 살던 산이 사라져 새 집을 찾아 나온 멧돼지 가족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집이 없어져 버린 멧돼지 이야기를 읽으며 처음에는 하루아침에 그렇게 없어질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옆 산이 사라지는 기세를 보니 기계의 힘은 놀랍고 무서웠다. 그 멧돼지 가족이 도심을 떠돌다가 어떤 아파트 한 집에 가족들을 내쫓고 살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2학기에 몇몇 초등학교에 그림책으로 환경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때 가장 먼저 생각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생물다양성이 위협받는 시대이다.
지구에서 서식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1300만 여중의 생물 중 70여 종이 매일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대부분 지구의 환경변화보다는 개발과 오염이 원인이라고 한다. 값싼 개발을 위해 서식지를 오염시키고 파괴하는 것이다. 먹이사슬 속의 어떤 종이 사라진다면 다른 종은 어떻게 될까. 먹이 사슬의 상위 동물이 사라진 산에서 천적 없이 번식을 거듭해 수가 늘어난 멧돼지는 이제 먹이가 모자라 산 아래까지 먹이를 찾아 내려온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아침에 살던 산도 사라진다. 그 멧돼지 가족은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