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물리학으로 분석한 AI 버블
저는 스스로를 꽤나 보수적인 가치투자자라고 자부해 왔습니다. 기업의 본질 가치보다 주가가 높으면 쳐다보지도 않았고, PER(주가수익비율)이 역사적 밴드를 벗어나면 '광기'라고 치부하며 고개를 돌렸습니다. 챗GPT가 처음 세상에 등장하고 빅테크들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을 때도 저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저것은 전형적인 거품이다. 곧 꺼질 것이다." 저는 빅테크 주식을 단 한 주도 매수하지 않은 채, 관망이라는 이름의 방관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거품이라 여겼던 그들의 주가는 조정 없이 계속해서 신고가를 경신하고 있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상승세를 정당화할 만큼의 압도적인 '실적'이 뒷받침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기대감만으로 오르던 과거의 테마주와는 다릅니다. 숫자가 증명하는 성장을 목격하며, 저는 이제라도 원칙을 수정하고 이 흐름에 편승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저의 잣대를 고수해야 할지 자문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고민의 과정에서 발견한, 달라진 시장의 역학에 대한 기록입니다.
1990년대 물리학자 로사리오 만테그나(Rosario Mantegna) 등이 주창한 경제물리학(Econophysics)의 관점에서 보면, 뉴턴의 운동 법칙은 인간의 심리와 금융 시장의 역학에도 유효하게 적용됩니다. 물체의 질량이 클수록 움직이기 어렵지만,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추기도 어렵다는 '관성(Inertia)'의 법칙이 바로 그것입니다. 금융학에서 말하는 '모멘텀 효과(Momentum Effect)' 역시 이와 맥을 같이합니다. 이를 주식 시장에 대입해 보면, 과거 닷컴 버블과 현재의 AI 장세는 그 '심리의 질량'이 완전히 다릅니다.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당시 시장을 지배했던 것은 '무지한 개인들의 광기'였습니다. 당시 대중의 투자 심리는 깃털처럼 가벼웠습니다. 실제로 2000년 3월 버블 정점 당시 나스닥 100 지수의 PER은 무려 175배에 달했습니다. 기업의 실적이나 비즈니스 모델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사명에 '닷컴'이나 '테크'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가가 폭등했습니다. 가벼운 심리는 조그만 호재라는 미풍에도 하늘 높이 날아올랐지만, 반대로 조그만 악재라는 역풍을 만나면 허무하게 추락했습니다. 질량이 없는 거품은 쉽게 부풀고, 그만큼 쉽게 터졌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시장 참여자들은 닷컴 버블, 금융위기, 팬데믹을 거치며 학습된 '무거운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투자자들은 스마트폰으로 언제든 블룸버그 터미널 급의 데이터를 확인하고 기업을 철저히 분석합니다. 스마트폰이나 전기차 같은 혁신 기술이 등장했을 때도 사람들은 보수적으로 접근했습니다. 덕분에 이들 산업은 과도한 버블 없이 실적과 함께 우상향 할 수 있었습니다. 무거운 심리는 쉽게 흥분하지 않지만, 행동경제학의 '확증 편향'처럼 한번 믿음을 가지면 쉽게 투매하지도 않습니다. AI는 이 무거운 심리의 검증을 뚫고 실적으로 증명해 냈기에, 지금 굴러가는 AI라는 볼링공은 쉽게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량'의 개념을 조금 더 세분화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AI 관련 기업이 똑같이 무거운 질량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장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와 같이 강력한 '플랫폼'을 보유한 기업과, 그렇지 못하고 단순히 AI 기술이나 기대감만 보유한 기업으로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플랫폼을 보유한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수십억 명의 사용자를 가두어 둔 거대한 생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오피스나 구글 검색, AWS 클라우드는 강력한 '락인 효과(Lock-in Effect)'를 발휘하여 사용자가 쉽게 떠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이들은 수천억 달러 규모의 막대한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이는 그 자체로 엄청난 질량이 됩니다. 기존의 탄탄한 비즈니스 모델 위에 AI가 결합되었기에, 이들은 외부 충격이나 거시경제의 작은 악재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가가 하락하더라도 그 하방 경직성은 매우 단단합니다.
반면, 플랫폼 없이 AI 기술 하나에만 의존하거나 테마성으로 묶인 기업들은 여전히 '질량이 가볍습니다'. 이들은 실적이 조금만 예상치를 하회하거나, AI 수익화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는 순간 과거 닷컴 버블 때처럼 급격하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즉, 무거운 심리가 지배하는 시장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플랫폼'이라는 질량을 확보하지 못한 기업은 여전히 깃털처럼 가벼운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투자의 구루 하워드 막스(Howard Marks)는 그의 메모를 통해 "시계추(Pendulum)는 중간 지점에 머무는 법이 거의 없다. 대신 양극단을 향해 계속해서 움직인다"라고 통찰했습니다. 저는 현재의 무거운 심리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이 '양극단(고평가 국면)'이 과거보다 훨씬 더 길어질 것이라 예상합니다.
현재의 장세는 닷컴 버블보다는 2008년 금융위기 직전과 구조적으로 더 닮아있습니다. 닷컴 버블이 개인의 가벼운 탐욕이었다면, 2008년은 똑똑한 기관들의 '합의(Consensus)'에 의해 만들어진 시장이었습니다. 당시 무디스나 S&P 같은 신용평가사와 투자은행들이 파생상품에 대해 암묵적인 합의를 이뤘던 것처럼, 지금의 AI 시장 역시 막대한 자본력을 가진 빅테크와 똑똑해진 개인, 그리고 전 세계 주요 IB들의 합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2008년은 부실한 파생상품이라는 '가짜 자산' 위의 합의였지만, 지금은 엔비디아의 PER 30~40배 수준이 보여주듯 '실제 버는 돈(Earnings)' 위에 세워진 합의라는 점입니다.
모두가 데이터를 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한 방향(AI의 성장)으로 쏠릴 때, 그 관성은 쉽게 되돌려지지 않습니다. 거품 논란에도 불구하고 실적이 계속 찍히는 한, 이 사이클의 상단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될 것입니다. AI 버블이 꺼진다면 그것은 닷컴 때와 같은 급격한 붕괴가 아니라, 실적이 주가를 따라잡을 때까지 천천히 식어가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매수를 고민하는 투자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무거운 심리와 질량의 법칙을 고려한 세 가지 실용적인 지침을 제안합니다.
첫째, 폭락을 기다리는 '현금 대기' 전략을 수정하십시오.
많은 가치투자자들이 닷컴 버블식 붕괴를 기다리며 현금을 쥐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 이번 사이클은 무겁고 깁니다. 급격한 폭락은 오지 않거나, 오더라도 아주 먼 훗날의 일일 수 있습니다. 시장 밖에서 관망하기보다는, 포트폴리오의 일정 부분은 반드시 시장 안에 발을 담그고 있어야 합니다. 소외되는 위험(FOMO) 관리도 투자의 일부입니다.
둘째, '플랫폼 질량'을 가진 기업에 집중하십시오.
변동성을 견딜 자신이 없다면, 플랫폼이 없는 중소형 AI 기업보다는 구글, MS, 메타와 같이 이미 생태계를 장악한 '무거운' 기업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들은 AI 거품이 일부 걷히더라도 본업의 현금 창출 능력으로 주가를 방어할 수 있습니다. 악재에 둔감하고 호재에 묵직하게 반응하는 기업이 장기 투자의 심리적 안정감을 줍니다.
셋째, 분할 매수로 진입하되, 긴 호흡을 가지십시오.
이미 주가는 많이 올랐습니다. 몰빵 투자는 금물입니다. 하지만 상승 사이클이 길어질 것을 감안하면, 조정이 올 때마다 분할 매수(DCA)로 대응하는 것이 유효합니다. 단기간의 차익보다는 AI가 전 산업에 침투하여 실질적인 생산성을 변화시키는 긴 호흡의 변화를 믿고 투자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AI 시장에 버블의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버블의 성질은 과거와 다릅니다. 깃털처럼 가벼운 비눗방울이 아니라, 고밀도의 액체 괴물처럼 끈적하고 무거운 버블입니다.
가치투자를 지향하는 저에게 여전히 현재의 밸류에이션은 불편합니다. 하지만 케인즈의 명언, "시장은 당신이 파산할 때까지 당신의 생각보다 오래 비이성적일 수 있다"는 말을 곱씹어 봅니다. 이제는 그 명언을 조금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장은 똑똑해진 참여자와 강력한 기업들 덕분에, 당신의 생각보다 더 합리적인 이유로 고점을 오래 유지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틀을 깨고 시장의 변화된 '질량'을 인정하는 유연함,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투자 원칙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