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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소피아 Oct 01. 2024

잔혹한 허리케인이 지나간 미국 남동부

와플 하우스와 짐 칸토리라는 이름을 기억하세요

미국 남동부 지역에 살게 되면 매해 가을 허리케인 영향권 안으로 들어온다. 이 시기에는 언제 허리케인이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쪽 지역으로 여행을 계획하거나 캐리비안 지역으로 크루즈 여행을 고려 중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혹여나 허리케인 복권에 당첨되면 아무것도 못할 테니 말이다.


대규모 폭풍인 허리케인은 바람의 속도를 기준으로 1단계부터 5단계까지 나눈다. 카테고리 1이 가장 "약한" 풍속인 119-153 km/h이고, 카테고리 5는 풍속 252km/h이상의 극심한 재앙적 피해로 분류된다. 저번주에 남동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헐린(Helene)은 카테고리 4였다.


허리케인의 장점(?)이라면, 지진 같은 자연재해와 달리 며칠 전부터 북상하는 경로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이다. 허리케인의 강타 예상 지역과 그 파괴력을 미리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상륙할 지역이나 해일로 인한 홍수가 우려되는 지역에는 비상 대피 명령(evacuation order)이 발령된다. 이 명령이 발령된 지역에 살고 있으면 즉시 떠나야 한다. 운이 좋아 막판에 허리케인이 다른 방향으로 경로를 틀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년 비상 대피 명령을 무시하고 집에 있다가 실내로 밀려들어오는 물을 찍어 SNS에 올리는 사람들이 꼭 있다 (조회수와 목숨을 바꾸는 행동을 왜 하는 것인가...).


아이러니하게도, 허리케인 시즌에 익숙한 사람들은 뉴스에서 "허리케인이 이 지역을 지나갈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그전에 미리 대비를 하지는 않는다. 해안가에서 멀리 떨어진 우리 동네는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허리케인 경로에 우리 동네가 포함되는 순간, 사람들은 곧바로 동네 슈퍼로 가서 물과 비상식품 (통조림, 비스킷, 과자 같은 실온식품)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홍수 가능성은 낮더라도, 강한 바람으로 인해 정전이 발생해 냉장고와 수도 사용이 불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유소에도 막판 주유를 하려고 온 운전자들로 인산인해다. 허리케인이 올 때엔 동네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지고, 슈퍼에 물이 동이 난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허리케인 상륙 몇일 전, 동네 슈퍼의 모든 물이 다 팔렸다.


참고로 지금 오는 허리케인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알고 싶으면 동네에 있는 와플 하우스를 보면 된다. 와플 하우스는 24시간 운영하는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인데, 여기는 어지간하면 절대로 문을 닫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 재난관리국(FEMA)이 재난의 심각성을 평가할 때 비공식적으로 와플하우스 매장이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용어가 와플 하우스 지수 (Waffle House Index)다.


만약 내 동네 와플하우스가 문을 닫는다? 그럼 내 목숨이 위험하단 뜻이다.
우리 동네 유일한 24시간 식당 와플 하우스


또한 짐 칸토리(Jim Cantore)라는 기상 캐스터가 있는데, 이 사람은 허리케인 피해가 제일 심할 것 같은 지역에만 출몰한다. 그래서 허리케인 시즌에 짐 칸토리가 동네 공항에서 목격되면 사람들이 걱정하기 시작한다.

짐 칸토리, 우리 동네에만 오지 마세요... (출처: WKOW 27 NEWS)

와플 하우스도 정상 운영하고, 짐 아저씨도 보이지 않는다면 비상 대피 명령은 내려지지 않은 거다. 대피 명령이 없으면 내 주위 사람들은 동네를 떠나지는 않는다. 다만 집에 수영장이 있다면 수영장 물 수위를 낮추고, 집 바깥에 있는 물건을 실내로 들여온다. 정전을 대비해 현금을 준비하고, 화장실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 놓고, 인터넷이 없어도 바깥 상황을 알 수 있게 날씨 라디오(weather radio)를 준비한다. 손이 닿는 곳에 랜턴도 미리 놔두고 보조 배터리도 준비해 놓는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면, 이제 허리케인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은 그저 무력하다.

하나 가지고 있음 요긴한 날씨 라디오. 산 속에서도 요긴하게 사용 할 수 있다.


이번 허리케인 헐린의 바람은 강력했다. 우리 동네는 허리케인 경로에서 벗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큰 나무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우리 집 모기장도 날아온 나뭇가지에 찢어졌다. 주말에 많은 직장 동료들이 오랜 시간 정전을 겪었다고 했다.

바람에 쓰러져 도로를 막은 나무들. 허리케인이 지나가고 난 뒤엔 날이 이보다 더 화창할 수가 없다.


허리케인은 제로섬 게임처럼 작용해 그 잔인함이 더욱 두드러진다. 한 동네가 무사하면, 다른 동네가 그만큼 더 큰 타격을 받아야 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원래 큰 피해가 예상됐던 플로리다 주의 탈라해시는 다행히 큰 피해를 면했지만, 대신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애쉬빌은 온 동네가 떠내려갔다. 현재까지 집계된 허리케인 사망자 100명 중 1/3이 이 지역 주민이라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애쉬빌은 그동안 자연재해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곳(climate haven)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렇게 큰 피해를 입을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 애쉬빌, 스와나노아 강에 잠겨버린 밴 한대 (게티 이미지).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보면, '언제든 바람에 날아가고 물에 떠내려갈 수 있는 집과 물건들에 집착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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