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는 숫자를 쓰는 노트가 아니었다
나는 돈을 잘 쓰는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더 쉽게 결제했고,
가끔은 내가 뭘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통장을 보면
무언가를 분명히 샀고, 돈이 빠져나갔고, 잔고가 줄어있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걸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불안했다.
돈을 쓴 건 나인데,
돈의 흐름을 내가 모른다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시작했다.
가계부를 쓰는 일.
처음엔 단순했다.
날짜, 금액, 항목, 메모.
엑셀에 정리했고, 몇 번은 앱도 써봤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기록'은 감정 없이 하기엔 너무 지루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법을 바꿨다.
그날의 소비에 한 줄 감정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은 참 외로워서 커피를 두 잔 마셨다."
"아끼려고 했지만, 결국 배달을 시켰다. 지쳤나보다."
그때부터 달라졌다.
가계부는 더 이상 숫자놀이가 아니었다.
내 하루를 돌아보는 거울이 됐다.
가계부를 쓰다 보면 보이는 게 있다.
단순한 소비 패턴이 아니라
내가 언제 지쳤는지, 언제 참았는지, 언제 위로가 필요했는지.
예를 들어,
배달앱 사용은 스트레스가 높을 때 급증했다.
편의점 간식은 외롭거나 지루할 때 많았다.
반면, 커피값은 행복한 날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 기록을 반복하다 보니
나는 어느 순간부터
돈을 '어떻게 쓸지'보다
'왜 쓰고 싶은지'를 먼저 묻는 사람이 됐다.
네이버 캘린더 + 메모앱 조합 (앱은 불필요할 정도로 심플하게)
매일 1회, 퇴근 후 또는 잠들기 전
[금액] + [항목] + [한 줄 감정 기록]
예: 4,500원 / 스타벅스 / 지쳤는데 굳이 마실 필요는 없었음
한 주 지출 총액 + 감정 키워드 간단 정리
→ '왜 많이 썼는지'를 돌아보는 시간
이 루틴은 스트레스를 주지 않되
내 소비를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유지하게 해줬다.
가계부를 쓰면서,
나는 돈을 쓰는 내 모습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
내 소비에는 이유가 있고, 그 안에는 감정이 있었다.
지금도 가끔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괜찮다.
완벽한 기록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바라보는 습관이니까.
그리고 오늘도 나는
지갑을 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지금 이 소비, 나를 위한 걸까, 감정의 반사작용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