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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 Jun 04. 2019

[뮤즈 모임] '가방'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글들

소재는 가방

*사진출처:<unsplash.com>





[뮤즈:이노성 작가] 


<가방 속 비밀 이야기>


나의 가방 속에는 비밀 이야기가 담겨있다. 점심 밥집, 회사 옆 카페, 편의점 맥주 영수증 등 확실히 동의하고 발행된 개인정보 가득이다. 가끔씩 정리하면 몇 달 전 위치추적이 가능하다.

세월을 거슬러 학창 시절에는 교과서와 필통, 성적표가 빈틈없는 포메이션을 유지한다. 휴가시즌 마지막에는 속옷과 양말이 깊은 구석 은폐•엄폐 중이다.

나름 직장 생활 전에는 디자인을 고심했건만, 지금은 두 손 편한 백팩이 최고다. 첫 차 사면 조수석이 가방이다.

요즘 에코백 유행이 너무 좋다.





[뮤즈:율 작가]


<책가방>


내려놓는다

고사리 손으로 책 틈 사이로 열심히 찾는다.

꼬깃꼬깃 접혀있는 자그마한 종이쪽지.

웬일인지 글씨가 번졌다

모서리가 찌브러진 종이 우유팩.

이놈이 범인이다

손바닥으로 다림질하여 앞주머니에 보관한다

사탕 두 개를 함께 살포시 넣는다

설렘을 가득 담아 지퍼를 닫는다

아침이 될 때까지

열었다 닫았다

책가방을 만지작 거린다





[뮤즈:김다빈 작가]


<가방>


요새 왜 이렇게 한쪽 어깨가 굽었냐며 당당하게 어깨 좀 피고 다니란 말을 들었다.
애써 자세 교정을 하고 어깨를 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가방을 멘 순간 엄청난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며 다시 원상복귀가 되었다.
예전엔 국. 영. 수. 사. 과 몇 권의 종이책과 철제 필통을 넣고 메고 다녀도 멀쩡했는데.
요새는 태블릿 하나. 종이서류 몇 장. 공책 몇 권의 무게로 차고 다닌다고 무게 밸런스가 무너진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한쪽으로만 메는 가방을 오래 쓰면 한쪽 어깨만 짓눌려 몸의 밸런스가 무너진다는 것을.
그렇다면 다른 가방을 메 볼까? 이 참에 새 가방을 살까?

그렇게 생각하고 손에 들고 다니는 서류가방을 찾던 순간 이건 일일이 들고 다녀야 해서 한쪽 손을 놀릴 수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과거로 회귀해보자.
디자인 좋고 양복에도 어울리는 백팩을 사 보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가 출.퇴근길 만원 지하철 속에 백팩은 이리 치고 저리 치이고 민폐로 찍히는 것을 깨달아 깔끔하게 포기했다.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가방이 많은데 나한테 맞는 가방은 왜 이렇게 찾기 힘든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매일같이 오른 어깨에 차고 다니던 크로스백을 오늘은 왼쪽 어깨에 메며 지탱을 해 보기로 했다.





[뮤즈:송진우 작가]


<검은색 가방>

무더운 날씨는 아니었다. 옷차림을 명확히 하기에는 아직 이른, 어느 봄날이었다.

제법 쨍한 햇빛이 그리는 문양을 피해 버스정류장 그늘로 피해 선다. 나는 연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예약 여부를 확인한다. 그녀와 처음으로 떠나는 여행에 만전을 기하고 싶다. 둘이 참으로 고대하던 여행이다. 이제 막 깊어진 사이에 무엇이 안 그러겠냐만은 오늘에 부여한 의미는 꽤나 특별하다.
 이윽고 저 멀리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녀가 보인다. 급행열차 시간엔 다소 늦었지만 상관없다. 평소에도 잠이 많은 그녀다. 어젯밤 서로 상기된 목소리로 통화를 했고 그녀는 준비할게 많다고 했다. 그녀도 나처럼 들떠 제시간에 잠들지 못했을 테고 이런저런 짐을 챙길게 많아서겠지.
 우리는 서로를 반갑게 맞았고 가볍게 포옹을 했다. 그녀의 큰 짐을 발견하고는 빼앗듯 들어준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오른팔을 껴안고는 손을 잡고 싶으니 돌려달라고 한다. 애교를 잔뜩 섞어 눈웃음을 보이며 올려다보는 그 모습에 나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내 가방을 건네준다.
 우린 둘이 꼭 붙어 앉아 서로를 바라본다. 이 여행을 바랐던 그녀는 즐거운지 수다를 멈추지 않는다. 어린 대학생 커플이라 뭐 대단한 여행지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송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송도에 있는 제법 비싼 호텔이다.
 연애 초, 너의 속도에 맞춰 기다리겠다고 어른인 척 내뱉었던 말실수 때문에 생겨난 여행이다. 그동안 육체적 관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점점 깊어지는 사랑과 함께 매일 밤 나는 그녀의 모든 걸 갖고 싶어 했다. 그녀는 나와 첫 관계만큼은 자취방이 아니라 호텔에서 하고 싶어 했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으고 막노동도 삼일이나 뛰어서 겨우 예약했다. 부유한 집 외동딸인 그녀도 이번만큼은 나에게 맡겨줬다.
 그렇게 고심했는데 왜 바보같이 송도를 골랐는지 후회가 된다. 송도에 도착해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도시 조성이 덜 되어 덤프트럭이나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길.. 그저 여행의 목적에만 눈이 멀어 다른 사항은 고려하지 못했나 보다. 그녀 몰래 검색해 초콜릿 박물관을 겨우 찾아냈다. 마침 오늘이 화이트데이니 어떻게든 연결시킬 수는 있겠다.
 한창 구경을 하고 와인과 함께 할 초콜릿을 사려하니 그녀가 급하게 손을 잡아 끈다. 그리고는 자기 가방 좀 봐달라고 한다. 그녀의 갈색 가방 안에는 정성껏 리본으로 맨 초콜릿 박스가 보인다. 어제 밤새 준비했다고 한다. 초콜릿을 손수 녹여 딸기와 함께 그럴듯하게 만들어 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나만을 위해 만들어준 정성이 고마워 두 손으로 한참을 떠받들고 있다. 민망함에 주위를 살피던 그녀는 얼른 낚아채 들고 있던 나의 가방에 집어넣는다.
 !!.. 아 내 가방은 아직 열리면 안 된다. 겨우 일박하는 여행에 내가 담을 건 그다지 없었다. 안을 채우고 있던 건 오로지 내 목적만을 위한 거였다. 종류별로 각양각색의 콘돔이 그녀의 초콜릿을 반겨준다. 긴 머리에 가려 그녀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잠시 경직되었던 그녀는 뒤적이며 젤을 비롯해 몇 가지를 더 찾아내었다. 그리고 싸늘하게 째려본다. 그 시선 앞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한참을 빌어 사과를 받아주었다. 발밑에 놓인 초콜릿으로 가득 찬 그녀의 갈색 가방과 대조되는 콘돔으로 가득 찬 나의 검은색 가방이 원망스럽다. 내가 여실히 녹아있는 그 가방이 또 어쩌다 바꿔 들게 되었는지 원망스럽다.
 비록 속마음이 들켰지만 내가 그녀를 아끼지 않는 건 아니다. 말과 행동으로 그 날 내내 그녀를 사랑해줬다.  호텔방은 아름다웠고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나서야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가방 가장 안쪽에서 러쉬의 입욕제를 꺼내놓는다. 월풀에 붉은 입욕제를 풀었고 곧 풍성한 거품이 일어난다. 우리는 함께 들어간다. 따뜻한 물은 우리의 몸을 달궈주고 거품은 피부를 더욱 매끄럽게 덮어준다. 서로에게 손길을 뻗는다.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의 몸 위로 올라탄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맞추고서야 그녀 깊은 곳에서 드러내지 못했던 감정을 알게 되고 그녀도 나를 원한다는 만족감에 행복감을 느낀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소식은 끊겼다. 그리고 난 조경가가 되었고, A3 사이즈의 도면이 들어가며 도면이 젖지 않는 검은색 가방만을 들고 있다.





[뮤즈:꽃샘추위 작가]


<사무엘 씨의 가방>

(스티븐 킹 다크타워의 잭 모트 부분에서 영감 받았습니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고민이 있다. 그런 고민은 어린 시절의 사무엘 씨를 괴롭혀왔지만 성인이 되고나서부터는 그 고민을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며 긍정적으로 감싸 안기로 했다.
 그는 열렬한 기독교 신자 어머니와 방탕한 술주정뱅이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행인 것이 있다면 삼촌이 보살펴 준 것이다. 그는 삼촌의 가게를 매일 놀러 가며 그와 시간을 때웠다. 삼촌의 가게는 마장동에 있는 축산업 가게였다. 삼촌은 가끔 후계자 대하듯 그에게 이런저런 노하우를 가르쳐주었다.
 “고기를 자를 땐 무조건 힘에 의지하면 안 돼. 숙련된 기술이 있어야 해.” 삼촌은 이 말을 가장 자주 했다.
 열여덟이 되던 해, 사무엘의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동네에 작은 교회도 함께 폐허가 되었다. 그는 그 교회를 증오했다. 그가 힘이 약했던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도살장 소를 대하듯 그를 그곳에 끌고 갔다. 그들은 노래를 하면서 울고불고했고 고함을 치다시피 그들의 주인을 불러댔다. 그는 그 눈꼴사나운 광경이 너무 싫었다.
 ‘좆같은 하나님의 나라로 꺼져라.’
  다만 그가 놀랐던 것은, 이 집에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 사라진다면 그것이 아버지라고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어차피 두 분 다 눈뜬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가 사라진 후 아버지의 폭력이 심해지자 그는 덜컥 집을 나왔다. 걱정은커녕 해방감을 느꼈다.
 그는 삼촌집으로 갈까 하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노숙을 했고 기숙사를 제공하는 뭐 같은 식당의 일을 했고 맘씨 좋다는 점장의 역시 뭐 같은 편의점 창고에서 생활하는 노예 짓을 거쳐 여러 곳을 전전하며 점점 더 지방으로 내려갔다. 일용직 쓰레기들이 넘쳐나는 조용하고 삭막한 동네라면 그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은 채 이제 나이가 들었다. 사람들은 그의 살벌한 기운에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도 그들과 가까이하지 않았다. 삼촌은 돌아가셨고 그는 혼자였다. 물론 상관없었다.
 저기 예쁜 여자가 지나간다. 이십 대 초반 같다. 그녀의 눈은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치마는 너무 짧다. 그의 몸 한 부분이 단단해진다. 그는 표적 거리를 재본다. 주위에 CCTV도 재본다. 그녀가 얼마나 부주의한지도 재본다. 그는 활동을 개시하기로 한다.
 그가 그녀의 목에 팔뚝을 걸고 난리를 치는 그녀의 입을 막고 폐공장의 파이프로 머리를 한대 쥐어박기까진 오분이 채 안 걸렸다. 머리를 쥐어박을 땐 힘 조절을 잘해야 했다. ‘무조건 힘에 의지하면 안 돼. 숙련된 기술이 있어야 해.’ 삼촌의 교훈이다. 그녀가 죽어버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피가 너무 튀면 안 된다. 머리에 피가 너무 많이 흐르면 그의 범죄행각이 발각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눈에 예뻐 보이지가 않았다.
 그녀를 업고 곰팡이 낀 자신의 집으로 가기까지는 십 분도 채 안 걸렸다.
 이제 그녀를 욕조에 넣고 그녀의 입에 수건을 쑤셔 넣고 테이프로 막은 후 그녀의 옷을 벗기고 테이프로 반듯하게 칭칭 감고 그녀의 목을 조르기까지 한 시간도 채 안 걸렸다. 그냥 잘라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여자들의 반항이 심해져 삐뚤빼뚤 잘릴 때가 있어 선호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침착하고 신속하게 하렴.
 고기를 자를 땐 무조건 힘에 의지하면 안 돼. 숙련된 기술이 있어야 해.’
 “알겠어요, 삼촌.” 그는 중얼거렸다.
 그가 고기를 자를 때마다 그의 성기가 점점 단단해졌다. 머리 댕강, 팔 댕강, 몸뚱이 댕강, 허벅지 댕강, 종아리 댕강. 그의 흥분이 점점 극에 달했다. 숙련된 장인이던 삼촌 못지않은 실력이었다. 그는 신중하고 묵묵히 작업을 처리했다.
 그가 투박하게 큰 가방에 몸통, 허벅지, 종아리, 팔뚝, 머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릴 때 그는 숨조차 쉴 수 없었고 최대한 집중을 했다. 이윽고 그의 바짓가랑이가 젖었다. 뜨겁고 축축하게. 그렇다. 이것이 그이 말 못 할 고민이었고 이제는 그의 일부분이 된 추악한 취미다. 근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딴 짓을 하며 흥분해서 사정을 한들 어쩌란 말인가.
 그는 가방 옆에 누워 사정 후 여유를 느꼈다. 이럴 때면 그는 십 대 시절이 떠올랐다.
 ‘사십 대 남성, 여대생 시체 토막 후 가방에 유기’ 그가 처음 이 기사를 접했을 때 아랫도리가 뜨거워졌고 그는 처음으로 손장난을 했다. 이후 그는 이런 기사를 병적으로 찾았고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면서 손장난을 했다. 이제 그는 기사를 보며 자위를 하지는 않지만 그를 흥분시키는 요소의 수위는 세졌다.
 그는 쉴 만큼 쉬었고 삼촌의 폐업된 가게에서 가져온 냉동고에 가방을 넣었다. 그는 기회가 오기 전까지 냉동고 속 시체를 떠올리며 손장난을 할 것이다. 다람쥐가 겨울잠에 대비해 식량을 모으듯, 그는 이것으로 꽤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죽인 여자가 몇 명인지 이제는 헷갈릴 정도다. 숫자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는 다만 이 순수한 흥분을 즐길 뿐이다.
 
 요즘엔 아무런 표적이 안 보인다. 보인다 해도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는 신중했고 섣부른 순간에는 절대 행동하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 그녀를 해체할 때를 떠올리고, 냉동고 속 그대로 방치된 가방을 떠올리며 손장난을 했다.
초인종이 울린다.
 “이사무엘 씨.”
 문을 거세게 쾅쾅 대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살짝 들어 창문을 보니 경찰이 쫙 깔려있다. 집중에 방해된 그는 짜증은 났지만 최대한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흥분에 박차를 가하기로 한다.
 피라미드를 쌓듯 차곡차곡 가지런하게 정돈된 몸과 하얀 피부, 그런 몸에 예쁘게 흘러내리도록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질할 때, 마침내 자신의 원하던 그림이 나오던 그 순간,
 “걸레 같은 년!”
 그녀의 허벅다리에 코를 대고 맡던 싸구려 바디로션과 비릿한 피 냄새.
 그의 집중을 방해하는 고함 소리, “이사무엘 이 새끼야! 당장 나와! 다 끝났어!” 그리고 드릴 소리. 좆같은 경찰들이 문을 따고 있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목을 조를 때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던 눈물방울. 어느 곳 하나 튀어나오지 않게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마침내 가방의 지퍼를 채울 때 느껴지는 그 흥분감.
 ‘미친년처럼 날뛰다 지금은 완벽하게 처박혀 있지.’ 그만의 예술작품이 된 그녀. 그는 예술작품 수집가고 그의 삶의 이유다.
 “씨발년!”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꼭 감은 두 눈.
 그의 숨은 거칠게 흐르고 몸은 점점 뜨거워지다 분출했다.

 경찰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 충격적인 광경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어느 정도 미친놈일 거란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숨이 턱 막혔다. 떡진 장발에 지저분한 수염과 역시 지저분한 얼굴과 또 역시 지저분한 스웨터에 하의는 없이 반쯤 죽은 성기만 덜렁대며 헤진 침대에 누워있었다.
 허벅지와 침대에 튄 정액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미친 듯이 웃는 깔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 날 30년 넘게 범죄와 싸우며 누구보다 성실히 별에 별꼴을 다 보았던 강력계 김 팀장은 후배와 소주를 마셨다.
 둘은 아무 말 없이 술만 마셨고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마침내 후배가 강력계를 그만두고 교통계로 옮기고 싶다며 넌지시, 그러나 강력하게 말할 때 그는 말릴 수 없었다. 자신의 부사수라 여기며 누구보다 아끼던 후배였다.
 사실 그는 옮기고 나발이고 아예 형사 짓을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삼키며 후배와 줄담배만 피워댔다.
 곰팡이 낀 쓰레기 더미 집안의 썩은 내와 샤워는 언제 했을지 가늠조차 안 가는 용의자에게 수갑을 채우며 바지를 입히다 구토를 한 애송이 형사 때문에 용의자는 눈물까지 흘리며 더 크게 깔깔댔고 결국 방귀를 실실 뀌자 자신의 방귀소리에 더 미친 듯이 웃어젖혔고 싱크대에 가득한 그릇과 그 안에 썩은 음식물에 득실대는 구더기, 이와 반대로 놀랍도록 정돈된 살해도구와 비린내 나는 냉동고 3대에 가득한 시신 가방에 그 안은 차곡히, 살포시 몸들이 쌓여있었고 그녀들은 눈을 감았는데도 자신을 보고 원망하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이 들었던 그 순간. 달아나고 싶던 그 기분. 그는 오늘 낮에 있던 일들이 파노라마 영상이 되어 자신의 머리에 깊숙이 박히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파고들지 말자, 제발 더 생각하지 말자.’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이 더 선명 해졌다. ‘미친놈이 그렇게까지 쳐 웃는데 아무도 닥치란 말을 못 했지.’
 김 팀장은 몹시 피곤했다. 그는 이제 자신은 너무 늙었다며 다독였다.





[뮤즈:심규락 작가]


<부표(浮標): 솜사탕> 

이 행성이 수백 번 돌기 전, 건네준 선물은
찢어진 끈과 나와 달리 참 서럽게도 빛났다
앞길만큼이나 등 뒤마저 생각해준
너의 마음이 담겨서 말이다
인간의 눈에는 짐승같이 남루히 헐벗은 내가
그쪽으로 몇 발짝 기어가면
거룩한 너마저도 밑을 보게 되는
시소의 끝날이 싫어서 그랬다

정말이지 비겁하지만 그리고 그만큼 비참했지만
그 선물을 빌미로,
지나간 그리고 지나갈 의미 없는 진심을
미천하게 이곳에 박제해본다
네가 준 검은색 가방 말이다

미안했다
그동안 해준 게, 해줄 수 있는 게
정말이지 실소가 나올 만큼 없어서
내 선택과 능력관 상관없는 세계로부터
청구된 0의 숫자를 맞춰야 하는 도중
널 바라보게 되었고
내려앉은 고개의 그림자를 들어 올린 각도만큼이나
너는 인내심과 배려심을 애써 넓혀줘야 했다
그것도 몇 해 동안

미안했다, 정말 미안했다
이미 망자의 현생을 살던 나를
그래도 바라봐 주던 네게 그토록 미안했다
나와는 다르게 고급인 그 가방을 줄 때마저도
난 가난한 축복 한 켤레도 주지 못하였다
신경 쓰였다고 말한 그 목적어는
낡아빠진 백팩이 아닌,
초라함에 절여진 나의 낮은 어깨를
묵음으로 삼았단 걸 안다

미안했다, 그런 네게 정말 미안했다
끼니 챙길 시간 한 켠 마저 없던 내게
자신의 모든 음식을 그 가방에 넣어줄 때 말이다
그리고 그 무게의 출발점이 입에 들어갈 처연함인지,
어깨에 맬 두 개의 끈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날 나의 등은 죽을 만큼 무거웠다
등에 각인된 미안함과 서러움이 더욱이 적재되자,
그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말 그대로 가슴이 무참히도 찢어져 나가며

미안했다, 그런 네게 난 정녕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매번 바래다주고 나서 뒷모습을 보일 때마다 말이다
불편한 다리를 절어가는 걸음마다 그 가방도 들썩거려
까만 부표로 네 눈에 들어올, 그랬던 매일 밤
숙연함이 베여 캄캄해진 지상의 밤바다에는
항상 그 부표와 네 걱정이 넘실거렸다
남들처럼 업어주고, 달려가 주지 못한 게
늘 미안했던 나 자신은 등부표(燈浮標)가 되어
너의 지평 끝에서 하루의 별 아래
그렇게 조용히 하강했다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모든 밝음이 서릴 네 앞날에
나의 명도를 입힐 순 없었다
그토록 투명한 그 바다에 있어서
부표는 못될망정 암초까지 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미안해서, 그만큼 아껴서
난 그렇게 또 한 번 너의 수면에서
홀로 깊은 수심을 택했다
모질다고, 무책임하다고 욕해도 좋다
어차피 산소통 없이 심해로 내려가기에

당연히 너는 미안할 것이 단 하나도 없다
그 3년 이란 해협에서 날 위해 진심으로 울어준 첫 사람
태어나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 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옹알이 터준 너는 4년 전 8월 23일,
내 모든 걸 눈물로 품어줬다
그런 너였기에 온 힘 다해 일부러 반비례해야 했고,
미안함을 지팡이 삼아 영영 등을 보인 채
그렇게 다시 한번 절뚝였다

그래서 널 떠올리면 아니 된다, 떠올리지 않는다
그래서 네 연락에 회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난 까만 가방을 멘 채,
지금까지 세상으로부터 모든 징벌을 받고 있다

이젠 하염없는 미안함보단
부디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밖에 없다
나 자신의 부표가 내려갈수록,
네 앞바다는 더욱더 깔끔히 순탄해지기에
난파선과 암초마저 이해해준 순간들을
이렇게 이기적으로 회항해본다

뱃멀미하듯 긴 글로 한 번에 모두 쏟아내고 싶었지만,
애써 나의 언어를 토막 내어 최대한 가지런히 정렬해본다
편지도 아닌, 시도 아닌
어쩌면 독백일 수도

가방, 무언가를 담아내는 것
그 가방, 미안함과 처연함이 담겨 있는 것
그리고 높은 염도가 서린 누군가의 눈물이,
담기지 않고 도리어 계속 새어 나오는 것
그렇기에 내가 지금 윤회의 사해(死海)에 고립된 이유인 것

지난해 10월 19일,
너는 내게 마음의 짐을 부디 나누어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너로부터 나누어버렸다





[뮤즈:허상범 작가]


<가방의 무게>

학창 시절의 가방은
어린 내게 너무나도 무거웠다.

이제는 가방이 없어졌건만
나의 어깨는 더욱 무겁기만 하다.

보이지 않는 가방의 무게에
어른들의 어깨는 날이 갈수록
구부정해지는 것이었다.

어른이란 그토록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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