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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 Oct 26. 2019

[뮤즈 모임] '카메라'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글들

소재는 카메라

<출처: unsplash.com>




[뮤즈: 정진우 작가]


<카메라>

렌즈 3.5-5.6
세상은 두리뭉실 어리둥절

렌즈 2.8
아침이 서서히 밝아온다

렌즈 1.8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렌즈 1.4
한낮의 태양은 눈부시다

렌즈 1.2
또 다른 아침을 기다린다

렌즈 11
한숨을 돌린다




[뮤즈: 송진우 작가]


<순간을 기억하는 두 가지 방법>

랜즈 안에 예리하게 갈무리된 순간이
세월 속에도 쉬이 지워지지 않듯이

기억 위에 그려 넣은 추억은
흘러감에도 풍성해져 부풀어가네

선명함이 좋아 꺼내보니 더욱 뚜렷해지듯이
아련함이 좋아 꺼내보니 더욱 따뜻해지네

잊힘이 아쉬워 서러운 것도 없지는 않았으나, 잊지 않으려 했던 노력 속에 찬란하다 여겨지는 기억이 더 많았습니다.




[뮤즈: 김지해 작가]  *주제와 다른, 평소에 썼던 글입니다.


못 견디겠는 것과 견딜 만한 것 사이에 직장 생활이 있는 것 같다. 어제는 못 견딜 정도여서 아침부터 언제 퇴사할지 고민했는데 또 오늘은 견딜
만해서 일단은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로 결론 났다. 내일은 어떨지 아직은 모르겠다.

이 마음을 나는 황정은식 고통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소한 한 가지 문제만으로도 전체가 틀어져 있는 느낌.
평지인데 한걸음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왜 넘어질 거 같은지.

가끔, 책 만들던 때를 생각한다. 그때가 좋았지, 라고 생각하는 날이 오게 될 줄 나도 몰랐다. 어쩌면 이렇게 뛰쳐나가고 싶은 오늘도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때가 좋았지, 생각하게 되려나 싶다.

결국 내지 못한 책이 있다. 그 책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을 때쯤 담당 편집자인 나는 퇴사했고, 새로 들어온 편집자에게 원고를 넘겨주었다.
신입 편집자는 원고가 좋다고 말했다. 나는 때때로 그 원고를 친구들에게 몰래 보여주기도 했다.

그 원고는 책으로 나오지 못했다. 내가 퇴사한 후로 편집장과 저자 사이의 문제가 불거져서 그렇게 끝났다. 




[뮤즈: 심규락 작가]


<궤를 같이하다: 나의 전선, 그들의 전선> 


시작되는 궤(跪)의 명령
무뎌지는 두 무릎의 강직도

“일고두(一叩頭)”

‘러ㅗㄹ’

완강함이 잠시 베였던 유리알
억울함과 두려움 사이의 눈물이 나린다
난 담았을 뿐인데
나 역시도 담긴 것뿐인데
그리고 기(起)

“재고두(再叩頭)”

‘ㅇ겨’

흙 알갱이가 아직 털리지도 않은
두 손의 N-1 번째 날숨이 채 가시지도 않은
조리개가 조아린다
악조스럽게 얽힌 전선을 부리나케 조여가며
그리고 기(起)

“삼고두(三叩頭)”

‘6ㅓ’

너는 왜 빛 뒤에 숨은 채
그저 방관뿐이었느냐
네 그 큰 눈앞에 꺼져가는 생명을
그리고 꿇어앉은 기(起)

나는 종군기자의 눈이자 손이고 발이요
피 구름으로 뒤덮인 음지서
이, 이 빛을 억지로라도 끌고 와 담아 알리외다

매섭게 노려보아야 하는 방향은 조금 달라도
똑같은 납덩이, 똑같은 전선
무참함과 숭고함을 실은 그 수레바퀴에 있어서
나 역시도 그들과 그 궤(軌)를 같이 하였소

명분에 의한 고통
관통으로 인한 신음
그 모든 걸 난 함께 해왔소
이렇게 이승으로 다시 돌아와 결과론 적 예를 갖추지만서두
그 저승의 통한을 여실히 보여주지 못하는 게 한이오

어찌 보면 맞소이다
본인은 그저 지켜보고 담기만 할 수도

허지만, 하나만 반문합시다
이 낯짝이 대면해야 하는
그 참담한 전경을 만들어낸 것은 누구요?
그 시공간에 대한 진실된 죄는 본래 어느 쪽에 있는 것이오?



<정말 모나카 그대로> 

“또 또! 할부지, 그렇게 드실 거면 차라리 나랑 뿌셔뿌셔 먹자니까!”

“그냥은 이 아프니까, 이게 편하다 편해.”

항상 그런 식이었다. 부친의 화과자 철학은. 라면땅 과자를 권하는 아들내미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친은 그래오셨다. 월남전 참전 등 지구본의 적어도 어느 한 부분에 깃든 총과 칼의 역사를 군인으로서의 겪어온 만큼, 약봉지 역시 셀 수 없이 대해왔으리라.

92, 즉 100에 가까운 두 자릿수의 몸에서 이행되는 들숨과 날숨, 그 공기의 신진대사는 갈수록 벅차 왔고, 지금도 보다시피 쓴 가루약 이후 모나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습관이자 처량 또는 체념의 관성이 실연 중인 것이다.

“할부지, 그거 그렇게 부셔 먹으면 더 맛있어? 나도 하나 글케 먹어봐도 돼?”

“음… 맛없어.”

옆에 가로수처럼 우두커니 자리한 TV에선 남자 앵커가 자칭 혹은 타칭 경제 전문가 한 명과 진지한 척 담론을 나누고 있었다. 국민연금이 해외 주식 위탁운용사에 대해 국내 주식과 유사하게 ‘가나다’ 등급 부여를 매기는 성과기반 시스템으로의 개편을 추진한다는 얘기였다. 이들이 굴리는 자금은 145조 원, 아마 부친이 수십 년간 들이마셔온 가루약의 알갱이 수도 조금 과장하자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 할부지! 그냥 내가 찍어줄게, 또 흔들렸어!”

“요새는 이거 이거 손도 보정해준다믄서……”

어느 순간부터 무언가를 자꾸 남기시려 한다. 갈 땐 가더라도 최대한 많이 담고 싶으시다면서, 조약돌 보다 아주 살짝 더 큰 효도폰을 실눈과 동일선상에 두시려 한다.

마음만은 오롯이 선명한 존재의 사실을 갖고 싶어 하셨을 테다. 다만, 그게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는 손 혹은 전장의 잔여물이 문제를 안겨줄 뿐이고. 손떨림 보정이란 새 기술은 착하게 말 잘 듣는 강아지일 줄 알았는데, 오랜 피의 시간과 좌초된 신경 앞에선 그저 휴지나 물어뜯어 제끼는 살쾡이 새끼였다.

“할부지, 이거 봐봐. 아까 그 부서진 모나카같이 나왔어. 히히.”

일부러 부서진 혹은 부서질 5,800원 모나카 한 봉지 세트처럼, 다섯 걸음 떨어진 내 자리서 언뜻 봐도 매 아들 사진은 꽤나 흔들려 나왔다. 그 찹쌀가루 반죽처럼 흰 얼굴에 눈, 코, 입은 대충 색이 입힌 팥소 같았다. 뭐, 부친에겐 나름 최선을 다한 결과물일 것이다.

“아빠, 나 졸린데 지금 꼭 가야 되는 거야? 밖에 엄청 깜깜한데……”

꼭 가야 했다. 눈, 손 또는 세월이 떨린 그날 밤의 마지막 사진 촬영 후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이 먼저 가셨던 모친을 결국 따라가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쪽 멀리서 강원도 원주까지 가는 이 밤은 암실 마냥 캄캄했고, 아들내미의 감은 눈처럼 깜깜했다. 달의 고삐를 조금 더 느슨히 잡고만 싶은 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가, 내게 있어 세상 마지막 군인이 반듯이 가로누운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수많은 ‘아이고아이고’ 소리의 열병식을 경건히 뒤로하고 우선 나왔다. 그 어떠한 생각 없이 그냥 나왔다. 이러한 삶의 상황은 일어나 있고, 저러한 남은 자의 무게 중심점은 지면에서 심장 쪽으로 더 가까이 올라와 있었다. 사실 남은 자 인지, 남겨짐을 당한 자라는 말이 더 적합한 지는 잘 모르겠다. 부친이 수없이 째려봤을 총기의 가늠쇠가 사라진 것처럼……

“아빠! 저건 할부지가 찍은 게 아니야? 모나카가 아닌데……”

그 부서지던 모나카가 아니었다. 부친과 관련된 이전 모든 사진들과 달리, 마지막 영정사진만은 정말 번듯하게 잘 찍힌 한 폭이었다. 당연한 것일 터. 사진 기사분이 찍어주신 것이니깐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모나카가 아닐 수밖에.

뒤따라 나온 아들내미 옆에서 담배 하나를 물었다. 덤덤한, 아니 덤덤해 보일 내 낯짝과는 달리, 고아인 내 손은 이 두툼한 담뱃갑 하나 찾는 것에 있어서도 수차례 몸을 더듬기나 했다.

‘연못물 위에 비치는 달을 보며 시간을 세니,
오늘 밤이 가을의 한가운데(もなか: 모나카) 로구나’

어느새, 아들의 졸음 섞인 칭얼거림이 아닌, 부친께서 이전에 달 아래서 담배연기와 함께, 일본 문인의 시를 읊으셨던 목소리가 들렸다.




[뮤즈: 유피린 작가]


<파운드 푸티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경준은 몸을 부르르 떨며 점퍼의 지퍼를 올렸다. 계속 여름일 것 같은 날씨가 갑자기 겨울이 되었다.
“후우 이제 슬슬 추워지네.”
날씨가 추워졌다는 사실에 경준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이라서 제대로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이지만 경준은 핸드폰을 들어서 괜히 사진을 찍는다.
“벌써 1년이네……”
생각해보니 1년 동안 많은 사진을 찍었다고 웃으며 경준은 작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정확히 1년이 되려면 아직 한 달가량 남은 시기. 하지만 날씨가 추워지자 유독 추웠던 그 날을 떠오른다.
요즘같이 스마트폰이 당연해진 세상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상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경준은 그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몇 안 되는 취미다.
하지만 경준의 사진은 언제나 일상에 있던 순간을 남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년 11월은 특별했다.
갑자기 한 번도 안 찍어본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 졌다. 그래서 무작정 디카를 꺼내들고 서울을 벗어나서 지방의 산으로 내려갔다.
경준의 목표는 바로 사자자리 유성우. 매년 11월마다 볼 수 있는데, 딱히 작년 11월의 사자자리 유성우가 특별하지 않았다.
특별했던 것은 사자자리 유성우를 찍고 싶었던 경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 여기 있다.”
추운 날씨에 서둘러 집에 돌아온 경준은 컴퓨터에 저장해둔 그 날의 동영상을 재생했다. 그러자 카메라를 두 대나 설치하고 자리에 앉은 경준이 보이는 것으로 영상이 시작된다.
“그러면 이제 천천히 구경해볼까.”
무슨 카메라가 두 대나 있을까 싶지만, 한 대는 장노출로 촬영해서 오늘 밤에 떨어지는 유성우를 한 번에 볼 수 있게 하는 카메라이고, 나머지 한 대는 동영상 촬영으로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촬영하는 카메라다.
두 대의 카메라가 잘 돌아가는 것을 확인한 경준은 보온병에 담아온 온수를 컵라면에 붓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유성우가 떨어지기 시작해서인지 경준의 눈에도 유성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유성우라고 해서 흔히 상상하는 대로 진짜 유성이 비처럼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뜨문뜨문 떨어진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경준이었기에 유성이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괜히 스마트폰으로 하늘이 보이게 셀카를 찍으며 놀다가 컵라면을 먹었다.
추운 날씨에 보온병에 있었다고 하지만 약간 온기가 가신 물이라서 설익은 면을 건저 먹고 천천히 국물을 마시던 경준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유성에 시선을 빼앗겼다.
길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유성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커지고 있었다. 실제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것이 가까이 오면서 크게 보이는 것이었지만, 경준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공룡을 멸망시켰던 운석 같네.”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경준은 피식 웃었다. 당장은 크게 보여도 곧 사라질 유성이다. 사자자리 유성우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유성은 그런 상식을 가볍게 무시하며 커졌다.
“어라? 저거 유성이 아니라 설마-”
불길한 상상을 입에 내뱉기도 전에 거대한 유성은 방향을 틀더니 그대로 경준을 향하여 떨어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유성이 아니라 기차의 가장 선두 부분인 기관차였다. 어째서 하늘에서 기관차가? 같은 의문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저것이 지금 이 자리에 떨어지면 확실히 죽는다는 생각에 경준은 도망치려다가 설치해둔 카메라를 보고 일단 카메라를 챙겨야 한다는 사실에 몸을 날렸다.
그 결과가 죽음이라고 하여도 경준에게 카메라는 그 정도로 소중했다. 하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관차는 생각보다 멀쩡하게 경준이 있는 산꼭대기의 옆에 불시착했다.
불시착이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멀쩡하다고 한 이유는 기관차의 어디가 부서지거나 찌그러진 것 없이 그저 옆으로 넘어진 것처럼 경준의 옆에 안착했기 때문이다.
불시착하면서 생기는 울림 같은 것은 없었다.
“콜록! 콜록! 이 빌어먹을 우주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풍경에 경준이 기관차를 조심스럽게 쳐다보는데, 기관차의 문이 열리며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소년이 뛰쳐나왔다.
아무리 높게 쳐도 10대 후반으로 보일 정도로 어려 보이는 소년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기관차를 발로 차며 투덜거리지만 그런 행동에도 기품이 보인다. 어지간한 아이돌보다 잘 생겼지만, 활동적이라기보다 머리가 좋아 보이는 인상을 가진 그런 소년.
단지 잘 생겨서 인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소년의 머리색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그냥 검은 머리 같은데, 별빛을 받아서 반사할 때마다 프리즘을 연상시키듯 무지개 색으로 반짝인다.
“……어, 음. 저기. 죄송합니다.”
우주선을 발로 차던 소년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경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더니 눈동자를 사방으로 굴리며 사과한다.
“아뇨. 딱히 피해는 없었습니다.”
“어, 저는 유란이라고 합니다. 빌어먹을 우주선 때문에 피해를 끼쳤네요.”
우주선이라고 부르는 기관차. 그리고 인간이라면 나올 수가 없는 프리즘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
그걸 본 경준은 단 한 가지만 떠올 수밖에 없었다. 저 기관차는 UFO고, 유란이라는 소년은 외계인이라고.

기관차 모양의 UFO를 타고 다니는 외계인 소년 유란은 자신이 여기에 불시착한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냥 평범하게 공간 도약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사자자리 유성우랑 딱 겹쳐서 트러블이 발생하는 바람에 불시착했다.
“그거 참 고생이 많네.”
“내 말이. 도대체 줘도 안 가질 우주선이라니까?”
“아니 공간 도약이 가능하다면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텐데?”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불시착을 하면서도 주변에 피해 없고 거기에 고장 났다고 했는데도 자가 수복. 즉 스스로 고쳐지는 기능을 가진 우주선. 지구의 기술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물건이기에 탐내기 충분하다.
그렇기에 경준은 신기하다는 듯이 스마트폰으로 연신 기관차 모습을 한 우주선을 찍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왜 기관차야?”
“……몰라. 디자인 한 놈에게 물어봐.”
숨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모른다는 유란의 말에 경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식으로 사 온 빵을 먹었다.
경준은 아직 목적인 사자자리 유성우의 촬영을 끝내지 못했고, 유란은 우주선의 수리가 끝날 때까지 떠날 수 없다.
그렇기에 적당히 잡담이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둘의 잡담이 이어지는 동안 어두워졌던 하늘도 밝아지고 유성우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에 맞춰서 유란의 우주선 수리도 끝났다.
“음. 딱 시간 맞춰서 끝났네.”
“그래 잘 됐네.”
경준이 카메라를 정리하는 동안 유란은 우주선에 다가가서 수리가 확실히 되었는지 점검을 마친다.
그렇게 헤어질 준비가 끝나자 경준은 무심코 우주선을 배경으로 유란의 사진을 찍었다.
“……이래 봬도 초상권이 있는데?”
“어디 가서 떠들지는 않을 거니까. 그냥 기념용이야.”
경준의 말에 유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우주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우주선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사라졌다.
그렇게 경준의 사자자리 유성우 촬영은 끝났다.

동영상을 끝까지 보면서 그날을 회상한 경준은 동영상 마지막에 사라지는 우주선과 그걸 복잡한 미소로 보고 있는 자신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몇 번을 봐도 신기한 영상이다. 그 날의 경험도 신기했지만, 제일 신기한 것은 이 영상이다.
그날 경준이 가져간 카메라는 총 2대다.
그리고 스마트폰은 영상에도 나오다시피 자신이 계속 가지고 있었다. 즉 이 영상을 찍을 카메라 따윈 없었다.
“도대체 이 영상을 찍은 것은 누구였을까?”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에 경준은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에 서둘러 손을 뻗었다.



<재촬영.>

영화와 드라마를 만드는 중에 수많은 트러블이 따라온다. 그것은 설령 인간을 초월한 불멸자라고 하여도 마찬가지.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편한 환경에서 영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통과시키려는 경향이 더 강해서 피곤하다.
그리고 지금 사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유로 재촬영을 해야 합니다.”
“……하하하. 사윤 형. 형 농담은 언제나 재미없어.”
“농담을 그렇게 정색하며 하면 누가 웃어?”
굳이 사자자리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을 골라서 촬영하고서 한 고비 넘겼다고 생각하던 모두는 사윤의 말에 다들 어색하게 웃었다.
사윤의 질 나쁜 농담이라고 생각. 아니 그렇게 취급하려고 애써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
“……분명 현장에서는 돌려보기까지 했잖아?”
“그래 그랬지. 하지만 지금 일어난 것이 현실이야.”
고개를 저으며 사윤이 선고를 내리며 촬영에 썼던 카메라들을 쳐다봤다. 세상에 하나도 아니고 메이킹 카메라까지 전부 고장 났다.
현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집에 와서 편집하려고 열자 텅텅 비어있는 메모리에 이미 한 차례 정신이 나간 사윤이다.
다른 사람은 뭐 문제가 없는데, 이번 주연으로 뽑은 두 사람은 정말 어렵게 데려온 사람들이라 문제다.
“그래서 말인데, 두 사람도 가능하지?”
“불가능하다면 또 쫓아올 거잖아.”
“아니 뭐 휴가 처리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다른 사람의 의향은 묻지도 않고 유란과 경준을 보며 물었는데,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시당했다고 화를 내거나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사윤 형, 괜찮아? 어디 아파?”
“……의사 불러올까?”
걱정하는 분위기가 역력하자, 사윤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봤다. 다들 하나 같이 걱정하는 표정이다.
“뭐가 문제인데?”
“사윤이 메가폰 잡으면 다른 사람을 무슨 작품의 부품으로 취급해서?”
다들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윤의 폭군 성향을 설하가 적나라하게 지적하자, 상우가 서둘러서 그녀의 입을 막았지만 이만 돌이킬 수 없었다.
“하하하. 내가 언제 그랬다고? 항상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며 만드는데.”
절대로 일부러 웃는 것이 확실한 사윤의 웃음소리에 다들 힘겹게 웃으며 촬영용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선을 넘으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디 가려고?”
“재촬영하자며? 그러니까 준비해야지.”
“너는 왠지 즐거워 보인다?”
“아. 솔직히 내 입장에서 영상미가 떨어져서 좀 불만이었거든.”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유진이 웃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한 마디씩 중얼거린다. 무언가의 체념이 아닌 이렇게 된 이상 갈 데까지 간다는 상태였다.

재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유성이 떨어지는 날이 아니라서 그걸 적당히 마법으로 때우는 수고를 한 것을 제외하면, 아니 오히려 덕분에 진짜 유성우가 떨어지는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 가능했던 재촬영이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유란과 경준이 헤어지는 것을 찍는 것만 남았기에 다들 적당히 자리를 펴고 앉거나 누워서 쉬는 중이다.
어쩔 수 없는 재촬영이라는 것 때문에 다들 어딘가 폭주해버렸지만 첫 촬영보다 훨씬 좋게 나왔다는 것에 사윤은 만족하며 혼자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경준의 옆에 앉았다.
“미안하다. 휴가 중인 사람 불러다가-”
“아니 뭐 휴가였으니까 괜찮아. 사진도 많이 찍었고.”
정말 상관없다는 듯이 경준이 자신의 가방을 툭 건드리며 웃자, 사윤은 속으로 안도했다.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경준은 가정이 있고 직업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카메라가 주제라는 이유로 데려온 것이다. 사윤이 알고 있는 범위에서 사진 찍는 것에 가장 환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준은 촬영 동안 메이킹 이상으로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을 찍기도 했다.
“그렇게 말해주면 고마운데, 애들하고 놀고 싶었을 텐데. 가뜩이나 바빠서 휴가도 잘 못 나오잖아.”
“아……. 그걸 말하면 좀 마음이 아픈데.”
경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자, 사윤은 자신이 지뢰를 밟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안 좋은 사정이 있어 보이는 얼굴.
하지만 상대가 경준이니 아이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를 걱정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너 우리 애들 본 게 언제였지?”
“그러니까. 4살인가 5살쯤 아니었던가?”
애 아빠이기도 한 경준의 말에 사윤은 최대한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경준이 3남매. 그것도 세 쌍둥이의 아빠라는 것을 떠올리는 것까지 성공했다.
경준 또한 초월자라서 불로불사를 달성했기에 얼굴만 보면 20대 중반이지만, 실제 나이는 낼 모래 40대 중반인 아저씨다.
“아, 잠깐 지금 네 나이가 45세이니까-”
“어, 우리 애들 지금 고2이야.”
안 본 지 며칠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고2라는 소리에 사윤은 살짝 놀랐다. 친구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냐고 할 수 있지만, 애당초 경준이 사윤을 포함한 이쪽 사람들을 자신의 다른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숨기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어, 그러니까 사춘기구나.”
“뭐 나보다는 덜해서 다행인데, 그래도 역시 아빠에게서 자립하려는 것을 보고 있으니 섭섭해진단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 애들 이야기가 나오자 신난 경준은 폰에서 가족사진을 찾아서 사윤에게 일일이 보여주었다.
괜히 사진이 취미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듯이 진짜 엄청난 양의 사진이었기에 사윤은 살짝 질려버렸다.
태어나서 아장아장 기어 다니는 사진부터 해서 가장 최근에 고등학교 입학식까지 진짜 어마어마한 사진의 행렬이다.
사람의 인생을 앨범에 박아 넣은 수준이다.
‘혹시 세 쌍둥이의 사춘기는 뭐만 하면 사진 찍으려는 경준에 대한 불만 아냐?’
입으로 내뱉으면 충격받을 소리이기에 최대한 삭히며 사윤은 경준의 사진 자랑에 어울렸다.
불멸자이니 초월자이니 하지만 원래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경준이다. 그리고 그런 경준에게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있다.
그런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을 지켜낸 것이 바로 사진이었기에 사윤은 경준의 사진에 대하여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뭐 덕분에 오랜만에 이렇게 사진도 잔뜩 찍고 재미도 있었어.”
한때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했던 어느 야구 선수의 LA로 시작하는 이야기 급으로 긴 경준의 사진 이야기를 들은 사윤은 슬픈 눈으로 경준을 쳐다봤다.
자신이 아는 한 경준은 이렇게 말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변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집안에서 이것저것 눈치 보며 쌓인 것이 많아 보였다.
“후우,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재미있네. 그런데 역시 사진이 부족해 보이는데, 집에 자동으로 사진을 촬영하게 카메라를 설치할까? 역시 동영상은 좀 별로인 것 같고.”
이상한 생각을 할 때마다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가는 특유의 웃음을 짓는 경준을 보자, 사윤은 이 녀석을 돌려보내기 전에 그 생각은 절대로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친구가 사진에 미쳐서 가정 파탄 나는 꼴은 막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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