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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리로 인생핥기 Jan 08. 2024

디즈니 위시와 공화주의

위시를 능력주의로 오인한 기사에 대해

이 글은 영화 위시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이와 디즈니 위시를 봤습니다.


일단 아이는 위시를 좋아했고 저도 동화 같은 이야기, 오래된 명작 동화책을 보는 것 같은 작화 등 덕분에 즐기면서 봤습니다. 디즈니를 좋아한다면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이스터 에그를 보는 맛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위시와 관련한 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위시의 내용이 능력주의를 비롯한 신자유주의를 옹호한다는 기사였는데요.


윤리 교사로서 어떤 사상을 실제에 적용하는 데 있어 발생하는 오해를 두고 보기 어려워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기사의 골자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화에서 개인의 소원을 각자가 이루자는 내용은 재능을 발현시켜 최상의 결과를 만들자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이고 능력주의적인 사고방식의 발현이라는 건데요.


일단 신자유주의, 능력주의의 개념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 권력의 시장 개입에 반대하고 시장의 자생적 질서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는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의 자유 지상주의와도 맞닿습니다. 노직은 어떤 가치보다 개인의 자유가 우선되어야 하며 그 자유란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있는 소유권리라고 주장합니다. 자유만을 강조하는 이론은 이기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고, 많은 부를 가진 기득권을 정당화할 수 있기에 한계점이 있습니다.


능력주의는 희소한 자원을 분배하는 기준을 능력으로 보는 이론입니다. 능력에 따른 분배는 얼핏 공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운의 영향(개인적인 운, 부모나 환경 등 사회적인 운)이 절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이 힘들게 노력했기에 실패한 사람들에게 오만한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다.(물론 그들의 노력이 실재라는 점에서 그 문제가 더 크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패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책하게끔 만들어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계층체계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기사에서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의 가치가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적인 것이라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본 위시는 공화주의적인 영화였습니다. 공화주의는 사익보다 공익을 추구하며 시민들이 공익 추구의 주체가 되어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이론입니다.


“개인이 자신의 소원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공화주의는 사익보다 공익 추구를 중시하기에 마치 사익을 무시하는 이론이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공화주의는 진정한 사익, 진정한 자유란 공익이 기반되었을 때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수업 때 많이 드는 예시인데요. “북한에서 산다면 개인의 행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공익이 없다면 사익도 존재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예시일 것 같습니다.


기사에서는 왕이 공익을 위해 개인의 소원(사익)을 모아 둔다는 식으로 해석했는데요. 이는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발언이라 당황했습니다. 공익은 모두의 합의에 의해 이뤄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한 명이 “다 너희를 위한 일이야”라며 정치를 한다면, 그리고 개인들은 자신의 안락을 위해 사익을 그 한 명에게 맡긴다면, 이는 정치적 참여를 강조하는 공화주의와 대비되는 독재입니다.


위시에서는 사람들의 소원이 사람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과 같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소원은 가슴 한가운데에 빛으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왕은 소원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소원을 구슬에 가두어 방에 놓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행사를 열어 몇몇 사람들의 소원을 이뤄줍니다. 이는 사람들의 소중한 소원을 인질로 삼고, 가끔 퍼포먼스로 소원을 이뤄주면서 그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는, 가스라이팅의 일종으로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은 채 생기를 잃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보다 더 중요한 소원,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동일한 소원을 통해 왕의 마법을 물리칩니다. 그들이 공익이라는 동일한 소원을 가질 때 그들의 가슴에 빛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빛들은 나뭇가지처럼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나무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개개인들의 동일한 소원이 하나로 모이는 이 장면을 보며 루소의 일반의지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루소의 일반의지란,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익에 대한 의지입니다.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사회계약은 공동체 구성원이 모두 하나의 의지인 일반의지를 수립하는 계약입니다. 이 계약을 맺게 되면, 개인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정치는 사익이 아닌 공익만을 실현하기 의한 일반의지에 의해 행해집니다. 즉 정치가 모든 구성원들의 의지대로 행해지는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의지가 국민들에게 내리는 명령은 국민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기에 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자율입니다.


그리고 공화주의는 바로 이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공익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성숙한 시민으로서의 자세인 시민적 덕성으로 조금 더 구체화시킵니다.


따라서 제 생각에 영화 위시는 단순히 개인의 사적인 소원만을 중시하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모두가 비지배로서의 자유, 즉 왕이 정한 대로 살아가는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고 봅니다. 즉 이 영화는 오히려 개개인이 자신의 소원을 향해 노력해 나갈 수 있는 “공익”을 추구하는 공화주의적 영화라고 봅니다.


공익과 사익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행복해야 합니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 북한의 사례처럼 말이죠. 우리 사회도 자신만의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서로 배려와 양보 등을 통해 공익을 실현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빛을 찾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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