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커피는 100% 내 취향이다. 물이 끓을 때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굵은 커피 알갱이들이 컵에 부딪히는 소리부터 작은 설탕 프림 입자들이 소복하게 내려앉는 떨림마저. 뜨거운 물에 녹아내리며 심오해지는 갈색의 빛깔과 설탕 녹는 고소한 냄새까지. 커피 잔을 받아 들고 입김을 불면, 수증기가 하얗게 일어 아주 잠시 미지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뿌옇게 흐려진 안경에 달콤함이 스며들고 이내 다시 시야는 환해진다. 뇌가 맑아지고 근심이 사라진다. 커피를 제조하는 일련의 과정부터 그 달콤함까지, 완벽하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믹스커피는 대체 불가의 최고 식품이다.
사실, 믹스커피를 마실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내가 있다. 달콤함의 이면이 치아와 장기 곳곳에 들러붙어 결코 몸에 좋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한두 잔 마실 때는 당당하게 마시지만, 하루에 세네 잔 손이 가게 되면 주위 사람 시선이 신경 쓰인다. 몸에 좋지 않은 걸 안다면서 끊지 못하는 내 모습... 그래, 나는 중독자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학교 일정은 숨 막히게 돌아간다. 숨이 막히니 제정신이 아니다.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정신을 꽉 동여매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사도 그런 직종이다. 제정신이 아니지만, 제정신이 아니면 안 되겠기에 그 간극을 믹스커피로 채워댄다. (일단, 나는 그렇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능력이 탁월하시다.) 이제 하루에 세네 잔은 기본이 되어 버렸다.
팬데믹으로 인해 개학이 미뤄졌던 탓에 대부분 학사 일정이 뒤로 늦춰져 버렸다. 학교의 시계는 뒤로 밀린 일정들을 소화해내느라 숨 가쁘게 돌아가는 중이다. 중간고사를 마무리하자마자 기말고사 시험 문제를 출제했고, 기말고사를 치렀다. 일분일초를 아껴가며 진도를 나갔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 많은 수행 평가들을 해냈다. 코로나 이전에 해오던 교내 대회나 학생 활동들도 가급적 그대로 유지했다. 짧은 일정 속에 토론대회도 경시대회도 빠지지 않고 실시했다.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학생들이 있다. 그런 학생들을 외면할 수 없는 교사들이 있다. 대단한 학생들이고 교사들이다.
교사로 살아온 20년을 돌이켜 보면, 지나칠 정도의 내가 있다. 모던타임스 찰리 채플린처럼, 나는 교육제도와 학교의 부품으로 존재하면서 그 어떤 융통성도 발휘하지 않았다. (창의적인 평가 방식, 학생 주도형 수업, 교과 융합 수업 등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된 수업 방식을 찔끔찔끔 적용해 보며 나름 '융통성' 있게 학교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발휘했다고 생각하는 '융통성'이란 것은 교육제도 내 부품으로써의 범주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융통성'이란 내 삶에 있어 융통성을 말한다. 20년 동안 나는 교사가 아닌 나에 대해 꿈꿔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일조차 내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융통성 없기는...
열심히 진도를 나가면 된다. 학생들이 수능에서 등급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시험 문제 푸는 기술을 잘 전달하면 된다. 그동안 익혀 온 자기 관리에 관한 이야기나 진정한 성취에 대해, 정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면 된다. 아이들을 자극하고 격려하면 된다.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노력은 필수라고, 삶은 녹록하지 않다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고, "나 때는 말이지~" 하며, 읊어대면 된다. 공존이 중요하다 강조하고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 말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 그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된다. 그 범주 안에서 최선만 다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간단한 척 이야기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학생들을 좋아하고 내 일이 행복하다.
2020년은 이상하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답답함이 밀려든다. 때로는 화가 불쑥 나기도 한다. '지금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그럴 거야.', '상실감이 커서 그럴 거야.'를 되내며 스스로를 위안해 보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답답함인지, 불쑥 일어나는 화는 어디를 향하는 것인지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 나 자신을 알 길이 없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한두 잔만 먹어도 되던 믹스커피 하루 정량이 세네 잔을 먹어도 부족하게 여겨지는 이유를 알아야겠다. 마흔 중반의 여자가 자신의 삶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가 믹스커피 정량이라니. 이미지 구겨지는 일이긴 하다. 글을 써야겠다. 왜 이렇게 답답한 것인지 모두가 힘든 시기이기에 나 역시 지친 것인지, 알아야겠다. 떠들어야겠다. 지나가는 학생을 붙잡고 하소연을 할 수도 없고, 바쁜 동료 교사를 붙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답답하다며 투덜거릴 수도 없을 터이고, 나보다 더 어린 남편(나이는 나보다 훨씬 많지만...)에게 이런 내 존재의 근본적인 질문을 이야기해본들 혼자만의 외침이 될 것이 뻔한 일이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교육 제도나 현실에 관해 고민하는 글들은 수도 없이 많다. 내가 여기서 또 떠들어 봤자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다. 교육 제도나 현실에 관해 비판하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렇게 신념이 뚜렷하거나 박학다식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를 쓴다한들 그건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게 길게 변명을 늘어놓는 걸 보면, 교육과 관련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거나 교육적인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내 맘 속에 있나 보다.)
잘 살고 있는지 알아야겠다. 잘 산다는 것의 나만의 기준을 세워볼 때가 되었다. 믹스커피 정도의 난이도로 이야기를 써내려 가고 싶다.브런치라는 플랫폼에 첫 글을 올린다. 몸에 좋거나 말거나 믹스커피는 계속 마셔야겠다. 믹스커피만은 '잘 사는 기준' 안에 넣어주고 싶다. 편파적이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잘 먹고 잘 살아볼 생각이다. 믹스커피 먹으면서, 잘 먹고 잘 살아 보겠다. 오늘은 믹스커피를 세 잔 마셨다. 현재 시간 오후 6시 15분. 전기 포트 스위치를 눌러본다. 네 잔 째 커피를 마셔 보겠다. 학교 일은 끝이 났고, 집안일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심기 일전해서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해야만 한다.쌀부터 씻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