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 먹어도, 잘 먹고 잘살기
어쩌다 컵라면.
나는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신선하고 다양한 재료로 요리할 것이다.
아이들을 잘 먹여야 한다는 강박은 큰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썼던 일기에서 시작한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얻어먹은 떡국 이야기다. 친구 집 엄마가 끓여 준 떡국을 보고 이런 글을 쓰다니... 다양한 재료를 나열하며 친구 집 떡국이 우리 집 떡국과 다름을 설명하더니, 마지막 문장으로 엄마에게 한 방을 크게 날려버렸다.
우리 집 떡국은 떡과 국물로 되어 있다.
오늘은 친구 집에서 떡국을 먹었는데 우리 집 떡국이랑 다른 떡국이었다.
친구 집 떡국은 고기, 두부, 떡, 국물이었고, 우리 집 떡국은 떡, 국물이다.
큰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일기장 마지막에 항상 다정하고 긴 코멘트를 달아 주셨다. 그런데, 이 일기는 무궁화 모양 도장만 덩그러니 찍혀 돌아왔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셔야 할지 난감하셨을 것 같다. 그날 밤, 잠이 들지 않아 오래도록 뒤척였던 기억이 있다. 희미한 무궁화 도장과 내가 끓인 멀건 떡국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미안하다, 아가야. 그날 밤 결심이 있었다. 잘 먹여야겠다,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하여 요리하겠다.
잘 먹어야 한다. 잘 먹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요리에 잼병인 내가, 직장 일만으로도 하루하루 숨 가쁜 내가 잘 먹이겠다 결심한 것은 그 자체가 무리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온갖 재료를 넣고 만든 이름 모를 국들, 세 아이가 동시에 손바닥을 맞대며 다시는 먹고 싶지 않다며 만들지 말아 달라는 감자 샌드위치. 미숫가루를 뿌린 보리밥 등. 나의 요리는 서로에게 못할 짓이었다.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우리 집 아이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일은 학교에 못 간다는 것이다. 공부도 운동도 친구도 아니고, 급식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슬프다는 아이들. 자괴감이 느껴진다.
컵라면이 그렇게 맛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영양 있게 잘 먹어 보자며.
초등 아이 둘은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한다. 나는 매일 출근을 한다. 아이들 점심을 해결하는 일이 가장 큰일이 되었다. 처음 몇 번은 아침 일찍 일어나 뭔가를 해두고 출근을 했으나,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보니 점점 해이해져 버렸다. 식탁에 돈을 올려두고, 김밥을 사 먹으라 일러두는 날이 많아졌다. 아이들은 동네 분식집을 전전하며 이것저것 사 먹기 시작했다. 초등 외식 문화는 엄마의 간섭이 없어지자 급속도로 진화하며, 편의점 시스템을 수용해갔다.
코로나는 우리 집 아이들을 라면 광으로 만들어 놓았다.
파김치가 되어 퇴근한 날이었다. "엄마, 힘드시죠?" 아이들이 예쁜 얼굴로 애교를 부린다. 뭔가 뜸을 들이는 게 보인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엄마, 힘드신데... 오늘 저녁은 라면으로 하면 안 될까요?" 순간, 버럭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화가 났는지, 누구에게 화가 난 것인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었다. 곰곰 생각해 보니 라면만 먹이면서 아이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인 것 같았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 아니라 방치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이 진실에 더 가깝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만큼 노력하지 않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원망,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그렇다고 더 애쓰면서, 더 노력하면서 살 수는 없다. 나도 살아야지... 이미 나는 파김치다.
일단, 오케이. 오늘 저녁은 컵라면이다.
단, 계란도 좀 먹고 파도 좀 넣어서 밥하고 같이 먹자.
우리 집 라면이 라면과 국물이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겠니.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흔한 남매>를 보며 알게 된 레시피가 생각났다. 컵라면 볶음밥. 라면과 수프를 봉지에 넣고 잘게 부순 다음 용기에 넣고 끓는 물을 아주 조금만 넣어 라면을 불린다. 프라이팬에 유기농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무항생제 계란을 스크램블 한다. 유기농 파와 임금님 표 이천쌀로 지은 밥을 넣고 볶는다. (이 정도면 집착이다. 결국 라면 투척할 거면서...) 불려둔 라면을 넣는다. 지글지글 볶는다. 한 끼를 해결한다.
엄마가 해 준 음식 중 역대급이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드는 아이들. 어깨를 으쓱하는 바보 같은 엄마가 있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참 행복했다. 컵라면 먹어도 잘 먹고 잘 살겠다.
저녁 상을 다 치운 뒤,
아이들에게 비타민 한 알씩을 먹였다.
괜히 미안해서 그랬다.
컵라면 먹어도 잘 먹고 잘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