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아빠와 그렇게 헤어지고 난 뒤
아빠 기일에 눈물이 한 번도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기일이 다가오기 한 달 전부터 나의 기분은 널을 뛰었고
마음이 어지러웠다.
요즘 왜 이렇게 힘들지.. 너무 인생이 고단하다..
이런 생각이 오래 지속되면 어김없이 아빠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패턴을 알아 차린 것이 아마도 26살쯤이었던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정말 열심히 부지런히 지냈었다.
겉모습은 정갈하고 밤낮없이 바쁘게 지냈다.
친구들과 젊음을 즐기는 시절도 없었다.
즐길 돈도 마음의 양식에 투자할 여유도 없었다.
정말 백조처럼..
수면 아래 아등바등 숨차게 돌아가는 발버둥을 티 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그러게 지냈던 것 같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
나는 괜찮고 나는 지금 나의 삶을 충실하게 지내고 있다.
주문을 걸면서 말이다.
스물일곱을 시작으로
생긴 원형 탈모는 낫기가 무섭게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며
머리카락이 빠졌고 결국 스물아홉이 되던 해에
나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일을 그만두고 일주일 동안 시체처럼 잠을 잤고
그다음 일주일은 빈둥거리며 못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며
돌아다녔다.
출근 일 때 지옥이었던 갤러리는
고객일 때는 너무 평온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주었고
일 년이 넘게 나를 괴롭히던 탈모는 두어 달 만에 씻은 듯이 나았다.
심신이 지쳤던 나는 봉사를 위해 다른 나라로 무작정 떠나게 되었다.
봉사라기보다 한국사람이 적고 영어를 쓸 수 있는 지역이 있고
내가 쓰임 받는 곳을 굳이 찾고 싶은 마음으로 그곳으로 떠났던 것 같다.
결국 그간의 피곤이 풀렸던 탓인지
타국에서 일주일간 입원을 하다 한 달 만에 돌아오게 되었지만.
몇 달 동안 몇 년간 하고 싶었던 일탈은 다 해서인지
후회나 미련은 없었다.
후배가 하던 작은 쇼핑몰을 인수를 했다.
일은 적고 한 달 동안 쓸 돈이 필요했다.
조금 일하고 한 달 생활비만 버는 심심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흘렀다.
또 어학원을 등록했고 박물관과 대학원에 원서를 냈고 교수님 조교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학생 아닌 학생 같은 삶을 시작했다.
내 인생에 짧았지만 가장 편안했던 시간이었다.
미술관으로의 이직은
최종 면접에서 프랑스 유학파인 어린 친구의 승리로 실패했고
오랜만의 영어 수업은 나의 재능 없음을 확인하며
암기로 때우고 있었다.
삶의 리듬을 바꿀 마지막 기회인 대학원은
차곡차곡 준비가 되고 있었다.
시간이 생겨서 인지
여유가 생겨서 인지 모르겠다.
또 몸살앓이를 한 달을 하고서 정신을 차려보니
아빠의 기일이 코 앞이었다.
뭔지 모를 서러운 눈물이 북받쳐올라
꺼이꺼이 눈물을 토했다.
아빠에게 왜 우리에게 이렇게 큰 숙제를 주고 가고
너무 힘든데 자꾸 힘든 것을 확인할 일만 생긴다고
너무 힘들다고 꺽꺽거리며 한 참을 울었다.
돌아가셨을 때도 먼지로 보내드릴 때도
납골당 앞의 사진을 바꿔드릴 때도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 때도
몰아치는 슬픔을 잘 견디고 있었는데...
7년쯤 지나서야 터진 슬픔은 해가 갈수록 넘쳐흘러만 갔다.
나의 스물아홉은 이십 대를 바친 나의 일과 작별을 했고
많이 아프고
많이 회복되었다.
문뜩 모든 것이 지겨워졌고
새로운 일이 하고 싶었고
결혼도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