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한 것이 없기에 사과도 없다.
내가 결혼을 해서 그나마 나의 심신을 달래주신 큰 형님(큰아버지의 맏며느리)에게는 외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이 결혼은 해서 딸을 낳았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시가 행사를 참석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형님의 잔치이니 나도 안부도 전하고 보고 싶었다.
집안의 가풍이 입으로 천냥빚을 지는 집이라 빌런들을 피해야 하긴 했다.
가기 전부터 며칠 밤을 지새우며 이번에는 가만히 꿀 먹은 벙어리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다.
그 개념 없는 막내 형님(큰아버지의 막내며느리)은 아마 안 왔을 것이고 그들의 자식들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안 왔을 것이고 아마 막내 아주버니만 와 계시려나... 혼자서 며칠 동안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네? 그게 무슨 의미세요?'
'여전히 무례하시네요?'
너무 점잖은 반격인가....?
'형님은 10년째 안 보이시네요. 잘 지내시죠?'
'애들은 이번에도 안 왔나 봐요. 아주버님이 이렇게 말씀을 잘하셔서 다들 편하시겠어요.'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다.
남편은 그날 골프 약속이 있어서 가지 못 한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그저 큰 형님의 잔치에 내가 가는 것이니 말이다.
그쯤 시모의 전화가 왔다. 남편에게 말이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또 돈이야기이다.
"우리는 얼마하고 누구는 얼마 하고 우리가 이만큼 하니까 너네는 얼마 해라."
본인들이 면이 설 수 있게 본인들보다 더 적은 금액을 하여라라는 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사이 코로나에 걸린 시부모는 본인들의 돌반지를 사다가
우리가 가는 길에 전해 주라는 통보를 하셨나 보다.
그는 날씨가 추워져서 골프가 취소되어 같이 잘 수 있게 되었다면서
금시세를 검색하여 봉투에 적어놓고 나에게 돌반지 3개를 사 오라고 했다.
갑자기 1돈짜리 3개를 사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물었다. "현금하니 좀 싸게 해 줬어?"
나는 말했다. "아는 곳에서 구해줘서 금방 구했어."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의 수고나 마음 생각 따위는 그와 그들의 궁금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는 필요한 말만 건네게 되었다.
그도 인지하고 있을까? 단지 본인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내가 불편할 뿐일 거라 생각한다.
이번에는 가고 싶었던 행사였는데도 몸이 너무 아팠다.
한 달 내내 감기로 고생하는 아이에게 옮은 듯했다.
쉬고 있다가 겨우 머리를 질끈 묶고 행사장으로 갔다.
큰 형님은 나를 굉장히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 주셨다.
조금 늦게 도착한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이제 받은 선물 준비해 주세요~반지 사진 들어갑니다~!!"라는 사진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인사를 나누며 조카에게 본인이 가져온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반지를 꺼내서 사진 찍는 곳에 올려두었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과 아는 사람들이 뒤섞인 곳에서
나에게 언성을 높이며 온갖 인상을 쓰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줬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바로 놓으면 어떻게???!!!"
예전에는 가만히 있었겠지만 지금의 나이기에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지금 사진 찍는다고 해서 놓는 거잖아. 금방 당신이 말했잖아. 누가 누가 줬는지!!"
큰 아주버니가 말했다.(팔은 안으로 굽으니까..)
"꺼내 놓으면 없어질까 봐 아직 꺼내지 말라는데."
"지금 사진 찍는다고 다 꺼내 달라고 하셨어요. 지금 그 사진 찍는 타이밍이거든요."
라고 말하는 나의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었다.
아차.....
그의 부모과 똑같은 행색이었다.
나도 어느새 무례하고 무식한 모습을 내 보인 것이다.
남의 잔치집에서.
큰 형님은 "내가 다 들었어. 내가 기억했다가 전해줄게"라고 말하며 우리를 수습했다.
"뭘 이렇게 각각 다 해왔어. 먼 길 오느라 고생했는데."라고 달래자 그가 말했다.
"허허 막중한 임무를 맡고 왔어요. 하하."
무시하는 나에게는 짜증 내며 언성을 높이다가 형님 앞에서는 허허 거리는 모습이
딱 시부의 모습이었다.
지킬 앤 하이드가 따로 없는 일상.
나만 아는 이 불쾌한 심장의 두근거림.
겪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수직적인 관계.
조용히 본인 조카에게 나누어도 될 말이었다.
그는 본인이 가져온 가치가 모든 행사진행보다 우선이 돼야 했다.
설령 내가 말하지 않고 놓았더라도 조카와 인사를 나눌 때에 본인과 부모님 고모님 이렇게 1돈짜리 반지를 3개 들고 왔으니 아기에게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전하면 될 일이었다.
굳이 밖에서 그렇게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혀야 했을까?
예전에 나라면 그 순간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피하기 위해 얼른 입을 닫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우적우적 밥을 처먹는 모습을 보며 나의 신세를 곱씹어야 했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남편에게 홀대받는 아내라는 것이 까발려진 것이 슬프고 절망스러워서 목구멍에 넘어가는 밥이 무슨 맛인지 몰랐을 것이다.
10년 동안 부탁도 해보고 울어도 보았지만 그와 그들은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나의 무너짐을 즐기듯이 더 당연한 듯 짓밟고 무시하고 비아냥거리고 비난하고 정죄했다.
그와 그들의 말과 행동을 가장 빨리 멈추게 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와 그들과 똑같이 또는 더 강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와 그들은 항상 그랬다.
그들처럼 똑같이 무식하게 하대하고 무시하고 막 대하면 그들은 공격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고는 늘 복수의 틈을 노리긴 했지만 말이다.
매번 모임에서 볼 때마다 음흉하게 웃으며 헛소리를 하던 막내 아주버니와 놀랍게 개념이 없으셨던 막내 형님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산 문제로 다툼이 있었다고 얼핏 들었는데 그래서 안 보이나 생각하며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린 순간 그의 큰아버지의 딸인 형님이 "잘 지냈어? 자주 아팠나 봐?"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 옛 시절 아버님의 도움으로 취직을 했던 이유였는지 주로 시부모와 연락을 주고받던 형님이었다.
시집가지 않은 두 딸을 금지옥엽으로 키우며 남의 딸인 나에게 시모 못지않은 눈치와 간섭의 말을 많이 했던 형님이었다. 신혼 초에 왜 따로 집들이를 안 하냐고 눈치를 주며 본인 실적 올려 달라고 여태 하던 청약도 깨고 다시 들어 달라고 하고 펀드도 들어달라고 생글생글 웃으며 요구하시던 그 형님.
"네 형님. 잘 지내셨어요.? 감기 때문에 힘드네요."
"뭐 코로나였어?"
"코로나는 두 번 지나갔어요."
"괜찮게 지냈어?"
"되게 힘들더라고요. 가래로 심하고 몸살도 심하고."
"남편한테 되게 아픈 척을 해뎄구나?"
"(그래... 그냥 지날 리가 없지...)네...? 하하하하 죽어야 아픈 줄 알아요.. 죽어야.. 죽으면 알 거예요.."
이쯤 되니 내가 자리를 떠났다. 더 이상 말도 섞고 싶지도 않았다.
예전 같으면 또 멍해서 어버버거리다가 집에 가서 그 말이 억울해서 질질 울거나 잠을 설쳤겠지만 조금은 달라진 나는 그래도 대답이라도 해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순발력 있게 딱 받아치는 기술은 어디 가야 배울 수 있는 것일까.
다시 태어나야 하는 건가..
듣는 순간 당황하면 아무 말도 기억나지 않거나
흥분해서 어버버거리는 것이
나아지기는 하는 걸까..
10년이 지난 모습이 이 모습이라니.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아이의 식사를 챙기고 있을 때 큰 형님이 옆 자리로 오셨다.
서로 안부를 묻고 눈치 빠른 큰 형님께서는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셨다.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말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그의 가족들이었고 잔치집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형님은 당신의 아들이 하나만 낳고 안 낳을 건가 봐 하며 내심 서운해했다.
나는 아마도 조카가 육아를 많이 같이 해서 그런 거라고 이야기했다.
사실이니까..... 육아를 많이 참여하고 일방적으로 많은 부분을 책임을 지게 되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아이지만 또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조카의 야무진 성격은 형님을 많이 닮아있다.
손도 야물고 부지런하고 깔끔하신 엄마(큰 형님)를 많이 도왔고 그게 몸에 베인 일등 신랑감이었고 아들엄마들이 말하는 소위 남 좋은 일만 시킨 아들이었다.
제사 때도 생각 없이 부엌밖에 먹기 바빴던 남편과는 다르게 부엌에서 낸 전을 부치고 음식을 나르고 설거지를 도왔던 사나이였다.
나는 "그래도 형님. 사네 못 사네 하는 것보다 낫지 않아요? 여자가 불행하면 살이 찌거나 피골이 상접하거나 둘인데 며느리가 여전히 이쁘잖아요. 저 보세요. 완전 돼지 되었잖아요... 흐흐.... 그리고 아빠가 잘하면 딸은 아빠같이 좋은 사람 만난데요."라고 말을 이었다.
형님도 "안 그래도 그 말을 하더라고. 잘 사는 게 더 좋지 않냐고. 그리고 임신부터 출산까지 그때 잘해야지. 평생 상처되는 거니까. 나도 아빠노릇을 잘해야 한다고 했어. 딸들은 그렇게 해야 더 좋더라고." 하시며 말을 이으셨다.
자연스럽게 고부와의 관계를 이야기했고
나도 편하게 이런저런 하던 중에 며느리 입장에서는 선물도 다르고 대우도 다르고 하면 서운하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말씀을 하시자,
앞에 있던 그가 말을 했다.
"그걸 꼭 의도된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게 예민한 거다. 그냥 먼저 왔으니까 줬을 수도 있도 가다가 생각이 낫을 수도 있고.....(어쩌고 저쩌고)...... 그걸 꼭 하나하나 기억을 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게 이상하지 않냐..!! 친하다고 같이 봤던 애엄마들과 만나도 결국에는 다 절교한다. 본인이 성격이 이상해서.!!....(어쩌고 저쩌고)..... 요새 많아요. 싱글도 많고 이혼도 많고 주변에 뭐 그게 예전처럼 흠도 아니고"라고 흥분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또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본인의 공감능력의 부재를 저렇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다니...
타인이 어떤 실수를 해도 어떤 잘못을 해도 너그럽게 이유가 있었겠지, 어쩔 수 없었겠지,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단체모임 친구모임에서 밥 값, 술 값 잘 내기로 소문난 좋은 사람인 그는 나에게 있어서는 늘 한치오차도 없는 잣대로 정죄하고 비난하였다.
타인이 어떤 잘못을 해도 그걸로 인해 부인과 본인의 자식이 어떤 피해를 받아도 그는 점 자놓고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니 절교와 절연도 다 나의 잘못으로 정의를 내린 후 비난해야 속이 시원한 사람이었다.
시모와 똑같은 레파토리..... 그 어미의 그 아들이라는 말은 이래서 생겨난 것일까.
그렇다. 그 말속에 그와 그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와 그들은 일어나는 모든 현상 앞에 나를 세우고
가장 앞서 나를 목소리 높여 비난하기로 작정한 사람들같이 행동했었다.
매사에 디테일하고 자연스럽게.
남은 지날 수 있지만 나는 지날 수 없는 그런 말들로 말이다.
네가 이상한 거다.
네가 예민한 거다.
네가 모자란 것이다.
네가 잘못된 것이다.
나와 우리 부모는 잘못이 없다.
네가 꼬인 것이다.
너는 부족하고 너는 나약하고 너는 게으르다.
그는 형님과 나의 나누는 대화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형님께 불만을 이야기해서 자신과 본인의 부모의 잘못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에 대한 복수와 비난,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응당 내가 자처한 일일뿐 본인과 본인의 부모 잘못은 티끌만큼도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저 표정과 몸짓.
착취와 조종을 하는 존재에 대한 죄책감은 없지만 수치심에는 굉장히 예민한 그와 그들.
그랬다.
2년간의 나의 투쟁 속에서도 그와 그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착취와 조종의 대상자가 떠나면 불편을 감수해야 하므로 잠시 한 걸음 물러난 것일 뿐.
(아마도 나의 일방적인 물리적으로 거리 두기가 더 가까운 설명이겠다.)
처음부터 달라진 것이 없었고 달라질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이 가장 힘든 것이다.
과대형, 공동체적, 독선적 나르시시스트인 그와 그들은 앞으로도 달라질 일은 없다는 것.
나는 잘못한 것도 잘 못 된 것도 없다.
고로
미안할 것도 사과할 것도 없다.
그들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다. 한 치의 의심 없이.
머리로는 알고 있는 이 사실이 그의 입을 통해 확인되는 순간,
나의 마음은 다시 한번 서늘하게 식어지고 서글픔이 차오른다.
내가 왜 이 모든 것들을 붙들고 있어야 할까 생각해 본다.
나는 왜 지금 당장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자식을 잃을 두려움에 아이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면서까지 이 가정을 지키려고 하는가.
예전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나도 공격하기 바빴다면 이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정신 차리자. 그들이 뿌린 미끼를 물고 더 이상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 생각은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무너지고 다짐하고 2년의 시간이 흘러가는 중이다.
이제는 생각을 멈출 수는 있게 된 듯하지만..
몸이 아직도 여전하다.
아직도 내가 나를 아끼기는 방법으로 이겨내기에는 어렵다.
왜 자기 파괴는 쉽게 하면서 자기 사랑을 못 하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짧은 시간 강력하게 당장 생각해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것을 반복하는 것.
그것이 어리석지만,
먹으면 배부르고 술 마시면 취하고 누우면 잠들고 잠들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고
특별한 노력 없이 혼자 빠르고 간편하게 이룰 수 있는 파괴적이고 옳지 않은 자기 위로인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고 모두가 이런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걸 의지박약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렇게라도 하면 아이에게 화를 덜 낼 수 있었고 다시 아침을 살아갈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아빠이면 좋겠다. 나는 아빠가 자랑스럽지가 않아."라고 말하는
나의 소중한 자녀에게
그나마 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아기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명할 힘이,
자신을 있게 한 아빠의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 자리 잡히지 않도록,
더 이상 아이가 뭔지 모를 불안감과 싸우느라 힘을 쓰지 않도록 도울 기운을
나는 빠른 시간 내에 돈을 들이지 않고 만들어내야 했다.
그는 핑계라고 했다.
일찍 일어나서 운동하고 아이를 데려다주고 틈틈이 집안일을 하고 정리를 하고 밥을 차리는 것이
올바른데 너는 아니라고 그러니 너는 그냥 부모 자격도 아내 자격도 며느리 자격도 없다고 했다.
너는 하는 일이 없는데 왜 아프냐고 했고 살쪘다고 하지 말고 처먹지를 말라고 했다.
그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가장 돈이 안 들고 빠른 자기 파괴적인 위로들을 벗어나기란 지금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핑계 아닌 핑계를 들 때면 다시 마음을 잡으려고 발버둥을 쳐본다.
아직 내가 견뎌야 할 이유를 새겨 본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나르라는 것을 인정하거나 깨달을 수가 없다는데
그런 이유에서 그도 불편하고 성가신 2년을 살고 있을 듯하다.
나의 이런 생각 또한 가스라이팅의 잔해일까.
나를 다시 찾아가는 이 순간에 발생하는 불편한 최책감과 미안함을 떨쳐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지 그와 그들에게 다시 동요되지 않고 나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와 그들이 잘못을 깨닫길 바라는 마음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이 오늘도 불편하게 심장을 조여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