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_2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폭행, 폭언, 무시, 비판, 비난, 비하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폭력을 평생 약속한 배우자에게 당했을 때
그때의 절망을 표현할 거리를 찾을 수가 없을 정도로 괴롭고 괴로웠다.
그 이후 부부싸움마다 이어졌던 폭언은 너무나 나의 삶을 피폐하게 하였고
경제력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 나에게 너무 큰 절망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무너진 자존감과 지속된 가스라이팅에 의해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아갔다.
그리고 그는 나의 상태를 놓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잡아 비난하였다.
그는 수가 틀어질 때마다 "지랄하네. 네가 한 게 뭐 있다고 좆같은 년이!! 어쩌고.. 저쩌고...!!!!!"로 시작되는 폭언을 시전 했다.
첫 폭력 이후 처음에는 살아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아이도 없었는데..
그리고 그때는 대화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처음이니까.. 실수일 거야.. 라며 나를 속였다.
처음이라도 실수라도 폭력은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나는 외면하려고만 했을까...
시부모님의 만행도 감당하기 힘든데 울타리가 없으니 눈 뜨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나날이었다.
제대로 된 사과는 없었다. 그는 본인이 행한 폭행과 폭언에 대한 사과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시댁의 방문이 잦았기에 내가 그 앞에서 괜찮은 척 티를 내지 않자 어물정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시부모도 부모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모가 걱정하니 부부싸움을 어른 앞에서 티를 내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내 발목을 잡은 꼴이 되었지만 말이다.
납득될 만한 반성도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도 얼마나 잘못했는지에 대한 사과도 받지 못했으니,
부부생활이 원활할 리가 없었다. 피하고 피하다 피하지 못해 진행되는 부부생활은 가뭄에 콩 나듯이 되었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냥 갈라서는 것이 맞겠다. 다짐하던 그 와중에 덜컥 임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이를 가지고는 시부모의 만행을 감당하느라 울타리가 되어주지 않는 그와 다툴 에너지도 바닥이 났다.
아이를 낳고 나니 나와 내 아이에게 보호자가 되지 않고 꼭두각시처럼 그들에게 휘둘리며 생각 없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우기는 꼴이 그동안의 꾹꾹 눌러 담은 분노까지 올라오게 하였다. 당연히 다툼이 잦아졌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니
“네가 아직도 임신 중인 줄 알지? 좆같은 년이 어쩌고 저쩌고.. 이 씨발년이........”
다 담을 수도 없는 육두문자와 맹 비난과 정도를 넘는 언어폭력은 매일 더 심해졌다.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이렇게 사는 건 아이에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 숱한 폭력에 그는 한마디 사과도 없이 시간과 상황에 의지한 채 실속만 취하고 책임은 피하는 선택을 계속하였다. 산후조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침대에 스스로 다리도 올릴 힘이 없어 손의 도움 받아서 다리를 끌어올려야 하는 나에게 잠자리를 요구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처음으로 고백하는.... ) 그 일이 일어났다.
그날이 무슨 날이었을까.... 나는 기억하고 싶지도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그날. 그 기분. 그 기억.
겨우 씻고 나온 나는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하고 샤워가운 원피스를 입은 채, 우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아이를 침대가장자리에 뉘었다. 뒤에는 그가 있었다. 몸을 더듬는 그에게 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계속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있었고 그는 가만히 있어보라며 기저귀를 갈기 위해 살짝 굽어진 나를 강제로 범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당황한 나의 거절은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질 않았다. 온몸이 굳어버렸다. 하지 말라고 피하는 걸로는 그에게 나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있는 힘껏 의사를 표현할 수 없었고 나의 몸은 멈춰버렸다. 아이가 나와 눈을 맞추고 기저귀는 갈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의 아이가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처참하게 범해지고 있었다. 아이가 놀랄까 봐 소리를 지르지도 방어할 사이도 없이 나는 이 지옥 같은 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말도 못 하는 아이가 처음 보는 낯선 표정. 불편하고 불안하고 치욕스럽고 굴욕적이고 슬프고 수치스러움에 움찔거리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이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득 밀려왔다. 샤워를 하며 왜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고 있었는지 그 순간의 나를 저주했다. 왜 그것밖에 저항하지 않았나.. 왜 이유 모를 두려움에 제대로 반항하지 않았나..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나를 지켜냈을까..? 아니다, 아이가 있었기에 나는 나를 더 지켜야 했다.
그의 가스라이팅에 나약해진 나는 나만 참으면 아이는 모를 거라 주문을 걸며 그 순간을 이겨냈다.
그때 미쳤냐고 정신 못 차리냐고 정신병자냐고 애가 자지러지든 말든 소리를 질렀다면.
그 일을 아이는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어렸으니까...
왜 그땐 아이 앞에서 소리를 지르면 이 작은 생명이 놀랄까 봐 혹시라도 기억에 남아 트라우마가 될까 봐 아무 짓도 못 하고 있었을까...
왜 나는 당황해서 온몸이 얼은 채 한 손에는 기저귀를 쥐고 버틴 것일까...
아이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100일 전에 얼굴을 모를 때 갈라서자는 나의 제안에 남편은 부부상담을 권유했다.
이 모든 폭력의 잔해를 산후우울증이라는 명목 아래 내가 잘못되어 만들어진 상황이라고 명명하고 본인과 시부모가 아니라 내가 예민하여 우울증에 걸려서 힘들어한다고 다른 주변까지 떠들고 다녔다.
아내를 위해 상담까지 받는 좋은 남편의 탈을 쓰고 교회에서든 밖에서든 나에게는 일말의 잘못이 없다는 증거를 확보한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채로 다녔다.
아이가 없을 때도 힘들었지만 아이가 있는 가정을 멈춘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모든 사건들을 상담을 통해 그가 인정하고 달라질 수 있다면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의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그는 여자 비하를 늘 달고 다녔다. 뉴스에서 성폭력 사건이 나와도 "둘만 알지. 알 게 뭐야 꽃뱀일지."라며 피해자를 탓했다. 여자를 무시하는 그는 상담사 선생님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듯 했다.
그저 내가 거기서 해소하고 예전처럼 입을 닫고 살길 바랬었던 듯했다.
근본적인 것은 해결하려고 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약을 먹으며 개인상담을 받았다.
그는 상담까지 받아주는 대단한 내가 남편이니 감사한 줄 알고 예전처럼 다 참고 입 닫고 살으라는 뉘앙스를 항상 심어주었고 언제가 입으로도 확인시켜주었다. "야 이 미친년아! 너만 닥치고 살면 되잖아 너만!!"
시모는 " 다 네가 예민해서 그래. 난 둘이나 낳았다. 다들 애 낳는데 뭘 그렇게 유난이니. 애 키우는 거에 더 집중해야지."라고 했다. 시부는 "네가 뭐가 모자라서 우울증이니.? 좋은 남편이랑 살고 있는데. 네가 생각을 빨리 바꿔라. 다 네가 의지박약이라서 그런 거야. "라고 했다.
거의 1년의 시간 동안 그와 그들의 수많은 변명만 쌓여갔고 내가 나 자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시댁도 남편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자리에 온 가족을 대표해서 와 계시네요..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그렇게 1여 년의 시간이 흘러 아이가 아빠얼굴을 알고 아빠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상담도 부부상담도 멈추게 되었다. 달라지지 않은 그와 그들을 보면서 돈이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떠나지 못한다는 걸 안 남편은 아이 앞에서 도발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 앞에서는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했다.
그렇게 고비에 고비를 넘기면서 나는 내가 살기 위한 생활로 변해갔다.
그것 또한 남편의 좋은 먹이거리가 되었다.
신혼 때부터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 택배정리, 화장실청소, 이사, 청소, 온갖 집안 잡일과 설거지 등등을 그에게 하나하나 시키면서 싸우고 싶지 않았고 출근길에 음식물봉투를 들려 보내고 싶지가 않았다. 돈을 벌어오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해서 그가 돈을 버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착각했다. 그러면 감사를 알고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고 불리는 것에 집중할 것이라고 착각했다.
아프고 힘들다고 하면 아프면 병원 가고
가사는 가정주부의 일이니 가사 도우미를 부르고 본인더러 도와 달라 요구하지 말라고 했다.
가사 도우미를 부르는 달에는 매달 돈이 나가는 날이 다가오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사람을 몰아세웠다.
“네가 하는 게 뭐가 있는데 아파? 네가 빨래를 해 청소를 해. 뭘 한다고 맨날 아파? 매일 잠만 처 자는 게!!!”라며 맹 비난과 폭언이 반복되었다.
주 3회 4시간으로 주 2회 4시간으로 줄여서 불러도 매일 같은 내용의 비난은 계속되었다.
난산으로 산후조리가 길어진 나는 100일 다 될 때까지도 침대 다리를 올릴 때 손으로 들어서 올려야 했는데 두 돌을 지날 무렵 겨우 운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다리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나의 운동시간을 확보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꾸역꾸역 지친 몸을 끌고 주어진 시간은 오고 가고 운동하고 모두 합쳐서 2시간. 저녁 10시나 되어야 시작할 수 있는 외출은 12시와 1시 사이 밤수유 시간이 오기 전까지 돌아와야 했다.
그 시간도 아이를 다 재운 후 남편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술 약속을 남기고 들어와야 가능한 일이었다.
운동을 시작한 후부터는 매달 카드값이 나오는 날마다
괜한 시비를 걸어서 돈이 어디 갔냐 매달 들어가는 돈 정리하고 가계부 쓰라고 무시와 닦달을 했다.
나에게 1원이 소비되면 그 이상으로 비하와 비난을 하고 매달 돈으로 사람을 멸치처럼 달달 볶아댔다.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면서부터는 내가 운동이나 미용실을 가는 달이면 어김없이 애를 볼모로 잡았다.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드니 '교육비를 줄여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매달 들어가는 돈이며 쓰는 돈을 네가 알고 있냐. 돈을 왜 다 쓰냐.
온갖 비난과 짜증이 반복되었다.
결혼해서 1년은 날 위해 한 달에 만원도 쓰지 않았고
아기 용품도 사지 않았고 백일까지 기저귀값도 들지 않았고
모유수유라서 분유값도 들지 않았다.
아기 용품도 아낀다고 얼마나 많은 경품행사와 산모교실을 다녔었는지...
내 신용은 그때 다 털렸을 것이다.
친정에서 유모차며 카시트며 백일상 값 돌잔치 값 주시는 동안
지 새끼 양말하나 사 오지 않았던 그 인간과 시부모.
나는 아이의 것은 양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의 것은 더 아끼게 되었다.
식당을 가도 아이 것만 시켰고 아이가 남은 것을 먹었다.
돈과 관련하여 이어지는 비난과 폭언은 계속 비슷한 명목과 패턴으로 반복되었다.
나의 푸념에 친한 지인이 가만히 듣다 "그 정도면 가스라이팅 아니에요?"라고 했다.
가스라이팅
그렇다. 나는 여태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심리적인 지배를 받은 나는 그의 허락 없이는 물을 사 마셔도 눈치가 보이고 운동이라도 할라치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쪼그라들었다. 나는 쓸모없는 돈을 쓸 자격이 없는 사람이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듣는 곳에서는 "운동도 하고 옷도 사고 싶으면 사~ 하고 싶으면 해~ 돈 줬잖아~."라고 했다. 후폭풍을 아는 나는 몇 달을 못 견디고 운동을 포기하였다. 행동하기 전에 그의 행동이 짐작이 되면 포기했다. 하나하나 허락해 주지 않으면 끊임없이 허락을 구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거칠어진 폭력을 행사했다.
난 뷔페를 좋아하지 않는다. 온전히 제대로 맛있는 한 그릇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뷔페를 좋아한다. 언제든지 본인 먹고 싶은 것을 바로바로 바꾸며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찾은 '페어링 6'에서 밥을 먹으며 맥주를 한잔한 그가 또 폭주하기 시작했다. 아이 앞에서 쌍욕을 하며 높아지려는 언성을 감당할 수 없어서 아기를 안고 피하는데 비아냥거리더니 "지랄하고 있네. 씨발 좆같은 년이!!"라고 소리를 치며 내 뒤통수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많은 사람들이 식사 중이었고 나는 아기를 안고 있었다.
뒤통수의 얼얼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나는 밖으로 도망치듯이 나왔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그는 당연히 미안하다는 말이 없었다. 본인은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생각과 말이 잘못되었을 뿐..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잠이 되었다.
돈이 들지 않고 따로 시간을 구걸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것.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침대가 나의 유일한 도피처가 된 것이다.
이 선택은 두고두고 그의 폭언 레퍼토리가 되었다.
"매일 잠만 처 자는 년이. 온 집에 불 꺼 놓고 집안일도 안 하고 하루종일 잠만 처 자는 정신병자야 너는!!!"
그리고 단유 후에 시작된 나의 혼맥시간도 그의 먹잇감이 되었다.
그는 매일 술을 마셨고 술이 들어가면 내가 해 준 음식을 먹으며 나에게 쌍욕을 했다. 술 취해 발작하며 시비를 걸고 비아냥거리며 비하하고 무시하는 날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빈번해졌다.
그는 매일 마시는 그의 음주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의 최근 3년의 열 번이 될까 말까 한 외출 중
가뭄의 콩 나는 듯한 바깥 만취함은 실랄한 비난과 정죄의 먹잇감이 되었다.
"너는 엄마 자격도 없는 년이야. 술이나 처먹고 다닐 거면 곱게 처먹던가. 야이 미친년아."
나도 참 한심한 것이 주량도 모르고 마시고 슬프면 슬픔이 넘치게 마셨다.
그는 내가 망가져가자 신이 나는 듯이 증거 사진을 남기기 시작했다.
영상을 찍고 사진을 찍었다. 외식을 해도 아이의 사진이 아니라 '이렇게 밥을 안 하고 사 먹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여행을 가서 좋은 걸 먹였습니다~'를 남기기 위해 아주 기를 쓰며 증거 사진을 모았다. 그리고는 협박했다.
"너! 술 처먹고 밥 사 처먹고 집 개판이고 증거 사진 다 있어.
니 몸만 나가. 거지 같은 년아.
너한테 왜 돈을 줘. 네가 밥을 해. 빨래를 해. 청소를 해.
여자구실을 해. 며느리 구실을 해.
애 학원 뺑뺑이 돌리고 커피나 사 처먹는 년이.
내가 너보다 못한 것이 하나 없는데 왜 애를 주냐?
양육비 아깝게. 너 같은 년이 뭘 알아."
7년 동안 내가 욕과 비난과 무시와 모욕과 폭력을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일 것 같아서 잡고 있는 거라고 하지 말라고 그토록 애원을 했건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선을 넘었고 나의 인내심은 7년째 되는 해에 끝이 났다.
악착같이 버티다 똑같이 해주자 7년 동안 아이 앞에서 쏟아졌던 폭력적인 도발은 비겁하게도 주춤해졌다.
잠시 소강상태였던 그의 폭력은 내가 모든 상황에서 나의 존재를 대우해 주고 챙기기 시작하자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며 부딪히지 시작했고 이젠 나도 똑같이 맞서니 이 분노가 온 집을 집어삼킬 만큼 충격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회를 거듭날 수로 강도는 강해졌고 나 또한 똑같이 대응했다.
그렇게 일 년 반이 흐르는 사이,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나보다 더 소중했던 내가 지키기 위해 발버둥 쳤던
나의 소중한 작은 영혼이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두 눈은 거짓이 없다.
아이의 눈빛이 달라지고 영혼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