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_1

방법은 없다.

by 몽운

그가 처음 폭력을 행사한 일은 아마도 신혼 초였다.

연애기간에도 그의 알 수 없는 짜증과 시비는 있었고 그로 인해 눈물을 흘린 날도 있었다.

이유 없는 비난에 마음이 상하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그 일을 서운하다고 말하면 되는데 꼭 다른 것을 꼬투리 잡아서 나쁘게 말하게 되는 것 같아. 너는 정말 이해심이 깊어서(???) 그렇게 해도 날 이해해 줄 것 같아서. 미안해."

지금 생각하니 결혼 전에는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도 하였고(내가 그렇게 느끼도록 편지까지 썼었다.)

본인이 엉뚱한 걸로 비난하고, 본인이 기분 나쁜 만큼 나를 상처 내고 기분 나쁘게 하기 위해 말했다고도 인정했었다. 나도 단점이 있고 그가 그의 잘못을 인정도 하고 사과도 하고 다짐도 하니 별일이 아닐 것이라 안일하게 받아들였다.


내가 그때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날은 그가 퇴근하길 기다렸다가 마중을 나갔다. 그는 치킨을 사가자고 했고 우리는 치킨집으로 가게 되었다. 야구인지 축구인지 생맥주를 마시며 기다리다가 아마도 시집살이의 힘듦을 신혼 생활의 고충을 나누는 것이 힘든 건지 아니면 못 다하고 온 회식이 밸이 꼬였는지 갑자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때까지는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남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저런 남자를 만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던 나이기에 귀까지 붉어져서 서둘러 치킨집을 나왔다.

급발진한 그는 집으로 도망가는 나를 길바닥에서 소리를 질러가며 잡아 세우고는 길바닥에서 폭언을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만하라고. 내가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니니 그만하라고. 외치는 나에게 손이 올라왔다.

집채만 한 손이 번쩍하고 나의 뺨을 지나갔다.


태어나서 사람의 형채에게 처음으로 나는 폭행을 당했다.

온 우주가 멈춘 듯한 순간, 저 멀리 순찰도는 경찰이 보였다.

결혼한 지 석 달이 남짓 된 그날의 일이 그가 나에게 행한 첫 폭행 사건이었다.

이때 나는 그를 넘어가서는 아니 되었다.

그 경찰에게 고소를 하면 의사 직업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말에 내가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되었다. 딸을 열심히 키워서 훌륭한 사위를 얻었다고 행복해하시는 엄마에게 맞아서 무서웠고 당황했고 앞으로가 막막하다고 어린 나이에 가질 이혼녀 타이틀이 너무 무거울 것 같다고 하지만 다 없던 일로 하고 싶다고 엄마에게 금전적 손해를 주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길 무서워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 일을 제대로 된 사과 없이 어물정 넘겼기에 그에게 나는 그래도 가만히 있는 사람으로 정의되었고, 그 후 수많은 그의 테스트에서 내가 참을 때마다 그의 폭력은 더욱 짙어졌다.

그의 머릿속에 나는 '그렇게 해도 가만히 있는 사람에서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정의되기 시작했다.

자기 연민이 짙은 나르시시스트인 그에게 죄책감이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폭행 이후, 이혼을 선택하지 못한 나는 그렇게 몸과 마음이 좀 먹어갔다. 시부모와 그의 막대함을 감당하고 누르며 외면하고 살아내야 했다. 결혼에 실패하는 것이 두려웠고 실패한 결혼이 이혼이라고 착각했다.

그 이후 그는 속된 말로 나에게 간을 보는 생활을 유지하였다.

시부모의 만행을 배우자라는 방패 없이 온몸으로 때려 맞고 화병을 얻은 나는 '섬유근육통'이라는 병명을 얻게 되었다. '족저근막염'은 옵션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탓하느라 바빴다.

지금은 입만 열면 집도 엉망이다 설거지도 빨래도 엉망이다 쌍욕을 하며 얼굴에 침을 뱉는 그가 그때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본인이 집안일을 해 놓고 병이 난다며 예민하다고 모든 것을 내 잘못으로 세뇌시키는 가스라이팅의 전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루하루 견뎌내고 버티기에 바빠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다.


본격적인 폭언과 폭행은 아이를 낳고 심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났지만 그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주 7일 새벽은 필드나 골프 PT 헬스 PT였고, 주 3~4회 저녁회식이나 술자리를 즐겼다. 주 1회 저녁은 야구까지 추가했었다. 그리고 주말마다 시댁행 또한 필수였다. 임신기간 내내 그렇게 방치된 생활을 했지만 아빠가 되면 또 달라지겠거니 했다. 하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이에게 아빠의 온기를 아빠의 부재를 느끼게 해 주기 싫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 사이 시부모는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쳤고 나를 방어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불쾌함을 표하자,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했다는 이유로 온갖 짜증과 시비를 생활화하였다. 어쩌다 골프를 못 나가거나 술약속을 못 가는 날이면 자고 있는 아이가 깰 정도로 언성을 높이려고 했고 나는 얼른 안 방으로 그를 데려와야 했다.

“네가 아직도 임신 중인 줄 알지?
임신했다고 봐줬더니! 좆같은 년이 어쩌고 저쩌고..........”

다 담을 수도 없는 육두문자와 맹 비난과 싸울 때마다 씨발년은 기본이었다. 정말 이 세상 모든 욕을 들은 것 같다. 사람이 살면서 육두문자를 들을 일이 있으려나.. 삼십 평생 없었던 일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언제가, 그는 밤낮없이 수유하는 나에게 대구탕을 해 주시러 온 것을 감사하지 않았다고 독하고 악한 년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들이 늘 팔아먹는...


너를 위해서


나에게 뭘 좋아하냐 묻지도 않았다.

내가 애 보느라 당신들 아들이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을까 봐

(그는 아기를 보지도 않았고 밥도 발 챙겨 먹고 매일 밤 코를 골며 자는데도 그렇게 염려가 되셨나 보다. 하긴 아들이 설거지하는 상상만 해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린다고 하시는 분들이시니 저런 생각을 하실 만도 했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은, 당신들 좋아하는 대구를,

당신들 아들에게 먹이고 싶어 들고 온 그 생선을 "그릇이 작다. 이것밖에 없냐?"

요란하게도 생색을 내시고 아기가 낮잠을 짤 수없게 딸그락거리시며 그냥 있으라며 온갖 살림을 뒤지고 이거도 없네 저것도 없네 트집을 잡았다.

치울 생각에 정신이 까마득해졌으나 싫은 내색을 못 했고 당신이 하신다면서 일초가 멀다 하고 말을 거셨다. 그 난리를 치고는 손질한 생선은 "네가 해서 먹겠니? 이건 우리가 가져갈게."라고 하시며 챙겨 가셨다.

그들의 아들을 위해 준비한 나를 위해서 사 왔다는 얼큰한 대구탕은 분명히 모유수유하는 나를 위한 음식이 아니었다.

시모는 아들이 보고 있으니 좋은 시모콘셉트를 지켜야 했는지 그릇을 여러 가지 씻고 건조대에 얹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실까..."어머니 제가 할게요..."

"어?? 그래. 그럴래~~???"

아니나 다를까 물로만 대충 행군 그릇과 식기들... 내가 한다고 안 했다면 나머지도 다 물로만 대충 헹구셨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온 부엌과 냄비와 그릇, 수저, 체, 바닥, 가스레인지 할 것 없이 비린내 진동을 하게 해 놓고 사라지셨다.

나는 행여 내가 탈이 나서 아이에게 젖을 못 먹일까 봐 너덜너덜해서 수저질도 오래 하면 놓치는 관절로 그 크고 무거운 냄비들과 온갖 뒤처리를 해야 했다.


아이를 깨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모유수유 중에도 시부는 안방문을 벌컥벌컥 열어 대는 것은 아주 별거 아닌 일이었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의 시시하고 고통스러운 날 들이 지속 되었다.


그와 다투는 소리를 아이에게 노출시킬 수 없었다.
부모라면 응당 그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무조건 참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툼 중에 폭언과 살아가던 어느 날 그의 퇴근길을 아이와 함께하기 위해 병원 앞으로 산책 삼아 데리러 나갔다. 아이는 자는 시간이고 내가 바깥공기를 맡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대화가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엄마 아빠가 되었으니 함께 잘해보자고 나눈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는 본인은 잘하고 있으니 너나 잘하라고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잘못했다는데 아니라 아이에게 좋다니까 같이 읽고 공부를 하면 좋겠다고 설명을 해도 폭주한 그는 길거리에서 또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고 걸음을 멈추었다.

신호가 깜박이는 신호등 앞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그와 더 큰 거리가 생기고 있었다. 고민했다.

'이대로 끝을 하면 저 아이는 어떡하지.

아이가 선택하지 않은 상황으로 저 아이는 왜 태어나자마자 피해를 봐야 할까.'

그냥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다 끝내고 싶었다.

열 시, 아이의 밤 수유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그 집을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어물정 넘어간 그의 모든 폭력을 싹싹 빌고 나에게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중환자실까지 경험한 아이의 배고픈 울음소리에 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표정이 느껴졌다.

'너는 절대 이 아이를 떠날 수 없구나..?'

그날 이후 나는, 한층 더 살인적인 다툼과 잦은 다툼 때마다 폭주하는 폭언을 견뎌야 했다.

지랄은 욕도 아닌 것이 될 정도로 내 얼굴에다 온갖 쌍욕과 비난과 정죄를 하는 것을 견뎌내야 했다.

그는 내가 아이를 안고 있을 때면 도발을 하였다. 그가 급 발진을 시작하려고 시동을 걸면 안고 있는 아이의 귀를 막고 그의 표정을 아이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얼른 피해야 했다.


그렇게 참고 참았던 7년이 흐른 후.. 처음으로 아이의 앞에서 터진 싸움을 걷잡을 수 없이 잦아졌고 아이는 아빠 엄마가 서로의 얼굴에 욕을 외치는 것을 들어야 했다.


(그 사건의 자세한 스토리는 발행글에 담았기에 생략하였다.)

https://brunch.co.kr/@mong-un/17


그와 시부모의 지속된 언어폭력이 선을 넘어 나의 영혼이 녹아내린 날부터,


나는 더 이상 아이 앞에서 나를 함부로 하게 두지 않게 되었고,
나의 공든 탑은 무너지고,
아이의 마음에는 잊히지 않는 상처가 생기고 말았다.


내가 밤수유를 하러 들어온 날부터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폭언과 무시, 비아냥과 비난은 생활은 결코 쉬운 시간들이 아니였다. 싸움 후에는 모멸감으로 몇일 밤낮이 큰 몸살을 치루듯이 아팠다. 그래도 아이를 보고 웃어야하고 아이를 책임져야하고 먹여야하고 보호해야 했기에 나의 상태를 외면하는 매일을 보내야 했다. 매일 밤 침대에 누으면 뼈가 녹아내리는 기분을 느끼며 오늘이 마지막이길 바라면서도 내 아이의 배우자가 나타날 때까지 나의 손을 떠날 때까지 버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모른 척 외면한 날에는 수면 아래로 내려갔을 뿐,


그의 수가 틀리는 날에는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모든 것은 내 탓이요.
나의 부족함이 되었다.


그의 폭력이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지금 그와 나는 달라졌을까...

내가 나를 그렇게 하찮은 사람으로 대하도록 두었다면

그와 그들은 반성이라는 것을 하고 나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행동을 변화했을까...

부부 싸움은 과연 물 베기일까?

그 말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가늘고 가는 나의 끈을 놓아버리자, 그와의 거리는 겉잡을 수 없게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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