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견딜 수 있지만 '너보다 불행한 건 싫어
태수 작가의 <어른의 행복은 조용하다> 에 나오는 열여섯번째 에피소드 '불행은 견딜 수 있지만 너보다 불행한 건 싫어'를 읽었다.
우리네 조상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멀쩡하던 배가 갑자기 아파오기 시작하는 민족이었다.
1973년에는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가정의례준칙)까지 만들어 관혼상제에 드는 과도한 비용을 국가 차원에서 막아야 했던 민족이었다.
즉 배고픈 건 참을 수 있지만, 배 아픈 건 못 참는 민족이었다.
하지만 2026년 현재 대한민국은 명목 GDP 세계 15위, 1인당 국민 소득 3만 5000불, 선진국 클럽인 OECD에 가입한 나라다.
또한 K-POP과 한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전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처럼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로워졌으며, 문화적 위상 역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더 불행하다고 느끼는 걸까?
왜 나를 포함한 정신과 내원 환자는 해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상담 및 약물 치료로도 부족해 폐쇄병동에 입원해야만 하는 환자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는 걸까?
그건 절대적인 빈곤인 보릿고개는 넘었을지언정, 타인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인 빈곤이라는 더 가파른 고개를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수 작가는 그 원인을 '미친 경쟁'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얼마 전 나의 글에서 지적했듯이 건강과 영혼을 돌보는 러닝마저 경쟁의 대상으로 삼는 '경쟁 과잉' 이 대한민국을 집어삼키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러닝뿐만이 아니다.
수천만 원에 달하는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비웃음을 사는 자전거 동호회.
히말라야라도 등반할 기세로 전문 산악인의 복장을 갖추고 동네 뒷산을 오르는 산악회 회원들.
필드 한 번 나갈 때면 한 벌에 30만 원이 넘는 티셔츠는 입어줘야 하고(나도 포함 ㅠㅠ)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골프 백에 외국 유명 브랜드의 클럽을 가득 채워야 한다.
심지어 월 소득에 따라 사람을 '200충', '300 충'이라 부르며 사람을 벌레(蟲) 취급하기도 한다.
남보다 뒤처지는 걸 못 견디는 어른들의 이 광적인 경쟁심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도 전이되었다.
'5세 고시'라는 말이 나올 만큼 치열한 영어유치원 입학 경쟁은 이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옆집 아이가 '영유'에 다니기 시작하면 어떻게든지 내 아이도 영유에 보내야만 마음이 놓인다.
초등학생 때부터 아이들은 평균 서너 개, 많게는 7개의 학원을 뺑뺑이 돌다 저녁 10시쯤에나 집으로 돌아온다.
중고등생들의 살인적인 스케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초등학생들의 입에서조차 '휴먼 거지', '엘사', '빌거', '임거', '월거', '전거' 등의 혐오 표현들이 거침없이 나온다는 점이다.
아파트 브랜드나 거주 형태에 따라 친구를 등급 매기고 낮잡아 부르는 이 잔인한 문화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나 때는 안 그랬다.
물론 1972년 전라남도 강진군이라는 시골 깡촌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초중고 12년의 학창 시절에서 유일하게 학원이라는 곳을 가본 건 6학년 여름과 겨울 방학 때 다닌 주산학원 두 달이 전부였다.
전에도 밝혔듯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공부란 걸 시작했음에도 시골 고등학교에서 수업과 야자만으로 교대에 합격할 수 있었다.
(물론 3년 동안 죽도록 공부했다.)
호랭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라는 건 잘 안다.
지금은 그렇게 했다간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다.
소위 '지잡대'라고 비아냥을 듣고 있는 그 지방에 있는 대학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오징어 게임> 깐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이대로 가다간 다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먼저 사회적 차원의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 무한 경쟁 속에서 승자가 모든 걸 차지하는 승자 독식 구조를 깨트려야만 한다.
2000년대 후반 <개그콘서트>에서 개그맨 박성광씨가 외쳤던 것처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나를 술 푸게(슬프게 아님) 하는 세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 개인의 불행을 오롯이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사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한 번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심리적, 제도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셋째, 상대평가 위주의 교육 시스템을 절대평가나 프로젝트 중심의 협력학습으로 전환하여 친구를 '경쟁자'가 아닌 '협력자'로 인식하게 해야 한다.
(최근 초등학교 평가 시스템을 상대평가로 다시 되돌리려는 움직임이 있어 심히 걱정이다.)
개인적 차원의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비교의 대상을 타인이 아닌 '어제의 나'로 삼는 것이다.
캘리그래피 학원과 미술 학원을 다녔을 때의 경험이다.
내가 교대 다닐 때 유일하게 좋은 학점을 받지 못했던 과목은 미술 관련 쪽이었다.
교사로 발령받고서도 가능하면 옆 반 선생님과 미술과 체육 수업을 바꿔서 할 정도로 미술 쪽으로는 소위 '똥손'이었다.
그러니 같이 배움을 시작했던 동기생들에 비해 얼마나 뒤처졌겠는가?
처음에는 그게 너무 스트레스가 돼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그때 내가 찾은 방법이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과거의 나와 비교하는 것이었다.
연습했던 화선지와 스케치북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처럼 늘지 않는 것 같은 실력에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질 때면 전에 연습했던 결과물들을 들쳐봤다.
그곳에서 남들보다 느리긴 하지만 분명히 성장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블로그와 브런치를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지 깜짝 놀랐다.
기가 팍팍 죽었다.
왜 신은 나에게 모든 분야에서 눈곱만큼의 재능만을 허락하셨는지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지난번 경험을 되살려 과거의 나와 비교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가 읽을까 두렵지만 처음 썼던 글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가끔씩 그때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본다.
그리고 오늘 쓴 글을 다시 읽어본다.
역시 느리긴 하지만 분명히 한 단계 나아졌음을 깨닫는다.
또한, SNS와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타인의 가장 화려한 순간과 나의 평범한 일상을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 불공평한 게임이다.
퇴근 후 나를 행복하게 해주던 치맥이 친구의 인스타에 올라온 스테이크와 와인 때문에 갑자기 초라해 보였던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으실 것이다.
TV에서 방영되는 연예인들의 펜트하우스를 보는 순간 힘들게 마련한 소중한 내 아파트가 갑자기 초라한 초가집처럼 느껴졌던 경험이 있으실 것이다.
그래서 나는 SNS도 하지 않고 관찰 예능도 거의 보지 않는다.
다만 이웃 블로거는 몇 명의 이웃이 있는지, 다른 브런치 작가의 팔로워는 몇 명이나 되는지는 확인하게 된다.
속물근성이 금방 없어지지는 않는다. ㅋㅋ
참고로 '무소유'를 주장하고 실천했던 법정 스님도 깨끗한 빈방과 예쁜 다기 세트에 대한 욕심만은 평생 버리지 못하셨다고 한다.
하물며 속세의 때가 잔뜩 묻어있는 나같은 인간이 어떻게 모든 욕심을 끊어낼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성공과 행복에 대한 나만의 정의가 필요하다.
사회가 정한 성공 및 행복의 잣대(브랜드 아파트, 고가의 차량, 스카이 혹은 인서울 대학, 연봉 등)이 아닌 내가 가치를 느끼고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
나의 지인 및 동기들은 대부분 부부 교사다.
부부 합산 연봉이 2억이 넘어 서울 아니면 수도권 상급지 아파트에 거주 중이다.
또 대부분 승진해 지금은 교감 아니면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나는 12년 전 이혼해 지금은 김포 외곽에 있는 32평 아파트에 살고 있다.
우리 과에서 가장 먼저 발령받았으며 한때는 동기들 중 승진 레이스에서 가장 앞서가는 선두 주자였지만 10년 전 우울증 때문에 승진을 포기하고 지금은 체육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부럽지가 않다.(100%는 아니고 가끔 부러울 때가 있긴 있다.ㅋㅋ)
내 주변엔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친구들과 나를 웃게 만드는 해피 바이러스 선생님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배드민턴, 골프, 탁구, 캘리그래피, 필사와 같은 나를 즐겁게 해 주는 취미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글쓰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다 같이 가수 장기하의 노래처럼 쿨하게 '부럽지가 않아'라고 외쳐보자.
부러워서 자랑하고, 자랑하니까 또 부러워지는 굴레에서 벗어나 보자.
그런 의미에서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 노래 가사로 이 글을 맺으려 한다.
야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어?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전혀 부럽지가 않어
니가 가진 게 많겠니
내가 가진 게 많겠니
난 잘 모르겠지만
한번 우리가 이렇게 한번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해보자고
너한테 십만원이 있고
나한테 백만원이 있어
그러면 상당히 너는 내가 부럽겠지
짜증나겠지
근데 입장을 한번 바꿔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고
나는 과연 니 덕분에 행복할까
내가 더 많이 가져서 만족할까
아니지
세상에는 천만원을 가진 놈도 있지
난 그놈을 부러워하는 거야
짜증나는 거야
누가 더 짜증날까
널까 날까 몰라 나는
근데 세상에는 말이야
부러움이란 거를 모르는 놈도 있거든
그게 누구냐면 바로 나야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어?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전혀 부럽지가 않어
아 그게 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지 뭐
아니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게 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야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부러우니까 자랑을 하고
자랑을 하니까 부러워지고
아주 뭐 너무 부러울 테니까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어?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전혀 부럽지가 않어
마지막으로 당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실 한 가지 더.
이 비교와 경쟁은 우리나라만의 고질병은 아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똑같다.
독일어에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말이 있다.
'남의 불행(Schaden)을 보며 느끼는 기쁨(freude)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철학자 라 로슈코프는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더 행복해 보이기 위해 애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를 너무 낮게 평가하지 말자.
우리는 충분히 잘 해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