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쌤의 이름 외우기 고군분투기
<이 글은 2025년 12월 26일 작성한 글입니다>
어제 내 블로그에 주0가 댓글을 남겼다.
중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에 관한 이야기였다.
중 2병을 심하게 겪고 있던 자신에게 유독 관심을 갖고 챙겨 주시던 선생님이 계셨는데, 정작 나중에 찾아뵈었더니 냉랭하게 대하셔서 크게 상처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선생님은 출산과 육아로 인한 몸고생, 마음고생 때문에 약간의 우울증을 겪고 계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주0의 글을 읽으며, 내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13년 전, 내가 엄청 좋아하고 따랐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의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었던 경험이다.
역사 선생님이셨던 그분을 무척 좋아했고 따랐었다.
선생님을 따라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었을 정도로.
심지어 '대학 나온 여자와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생님의 고집스러운 철학(실제로 목포여상을 졸업하고 은행에 근무하시던 사모님과 결혼하심) 조차 멋있어 보여, 나 역시 목포여상을 졸업하고 삼성전자 연구 보조직으로 근무하던 초등학교 동창과 첫 연애를 시작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임용고시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선생님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교대를 가긴 했지만.
첫사랑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못 견디고, 그 후 대학 4학년 때 만난 동갑내기와 결혼하긴 했지만.
선생님이 조금 늦은 나이에 장가를 가시던 날, 이제는 담임도 아닌 그분의 결혼식장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었다.
선생님의 결혼을 축하하는 마음 절반에,
나의 영웅을 누군가에게 뺏겨버린 듯한 서러움 절반이 합쳐진 묘한 눈물이었다.
그 정도로 좋아하고 따랐던 선생님이었는데.
그리고 대학 입학하고서도 3년간은 계속 모교를 방문해서 찾아뵀었던 선생님이었는데.
13년 전쯤이었던가!
이혼 후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전국을 떠돌다 문득 목포에 계신 선생님이 보고 싶어 연락을 드리고 찾아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 선생님은 나를 완전히 다른 학생으로 기억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당황하셨고 나는 서글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에게는 선생님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 한 분의 선생님이셨지만,
선생님에게 나는, 선생님이 가르쳤던 수많은 제자 중의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중에는 기억의 조각들이 맞춰지면서, 온전한 나로 기억해 주셨다.
그리고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안부 전화를 드리고, 가끔씩 찾아뵙는 나의 영원한 스승님으로 남아, 목포에서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계신다.
이 해묵은 기억을 꺼내든 건, 요즘 내가 겪고 있는 당혹스러운 일상 때문이다.
내 나이 어느덧 쉰 넷,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예전 같지 않다.
근데 출퇴근 길이나 학교가 위치한 아파트 단지에서 작년, 재작년 과학 전담이나 스포츠클럽 활동을 통해 가르쳤던 아이들을 마주치는 일이 다반사다.
녀석들은 반갑게 '명쌤' 하며 달려와 대뜸 시험이라도 치듯 묻는다.
"명쌤, 제 이름 뭐예요?"
당혹스럽긴 하지만, 그네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해 준다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파동을 일으키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변곡점도 바로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전라남도 강진군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고등학교(강진고)에 중상위권 정도의 성적으로 입학했던 내가 교대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름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시작과 함께 국어 선생님께서 새로이 발령받아 오셨다.
전남대 국어교육과를 막 졸업하신, 예쁜 여선생님이셨다.
근데 한 달이 지나도록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셨다.
당연했다.
한 반에 50명, 6개 반, 3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의 이름을 모두 외우시는 일은 선생님께 벅찬 일이셨을 거다.
게다가 나는 키도 작고, 공부는 고마고만, 성격은 조용한,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같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선생님 눈에 띄고 싶었다.
곧바로 서점에 가서 국어 문제집 5권을 샀다.
국어과목만 죽어라 공부했다.
중간고사가 끝났다.
시험지를 들고 선생님이 들어오시면서 물으셨다.
"김종명이 누구야?"
조심스럽게 일어나 손을 들었다.
"이번 2학기 중간고사 국어과목 전교 1등은 김종명입니다."
아이들이 놀라고 나도 놀랐다.
그날 이후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내 이름을 불러주셨고, 나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죽어라 공부했다.
그 한 번의 '호명'이 나를 교대로, 지금의 이 자리로 이끈 셈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물어보는 상황으로 다시 돌아온다.
곧바로 이름이 떠오를 때도 있지만, 생각이 안 날 때가 사실 더 많다.
그럼 아이의 얼굴은 실망감으로 가득하고, 내 머릿속은 하얗게 지워진 도화지처럼 막막해진다.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며칠 전, 1학년 선생님들과의 회식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작년, 그러니까 2024학년도 졸업생들이었다.
세 명의 여학생들과 마주쳤다.
환한 얼굴로 뛰어오더니, 여지없이 "명쌤! 내 이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물어온다.
하0이와 태0이의 이름은 곧바로 기억해 냈다.
근데 나머지 한 아이의 이름이 가물가물하면서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면서 내 입술만 바라보는 아이 앞에서,
나는 "네 이름은 말이야...."만 바보처럼 반복해야만 했다.
끝내 아이 이름의 초성을 물어보고서야, 라0이의 이름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심지어 풋살부 골키퍼를 맡았던 학생이라,
내가 전담 코치로서 손수 지도했었던 아이였는데.
미안함에 마음이 무거웠다.
비슷한 상황들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결국 나는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들처럼 답을 찾아냈다.
6학년 연구실에 비치되어 있는 졸업앨범을 다시 펼쳐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틈나는 대로 6학년 연구실에서 졸업앨범을 뒤적인다.
한 명 한 명, 눈과 마음에 그네들의 얼굴과, 함께 했던 추억을 다시 새긴다.
댓글에 남긴 주0이 글귀가 내 마음을 나지막이 두드렸다.
김춘수 님의 시 '꽃'을 이야기하며,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은데, 나는 과연 타인을 무엇으로 여기기 위해 애써 보았나!'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제자의 문장은 스승의 마음보다 깊고 단단하다.
나이가 들어 기억은 흐려질지언정,
아이들이 나에게 건네는 그 맑은 눈빛들을 '무엇'으로 간직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앨범 속 이름들을 가만히 읊조려 본다.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 주0처럼, 나 또한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이름을 불러주는 선생님'으로 남고 싶다. &*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새로 외워야 할 이름이 한 무더기 추가되었다.
놀이활동 수업으로 만나는 1학년 4개 반, 100여 명, 그리고 과학 수업을 함께하는 4학년 여섯 개 반, 120여 명.
도합 220개의 우주가 새로이 내게로 온 셈이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 옆에 USB 포트라도 꽂아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 데이터를 단숨에 내려받고 싶은 심정이다.
주 1회 수업하는 1학년은 진즉 포기했지만, 4학년 친구들만큼은 하루빨리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 이름은 왜 이리 다들 비슷하기만 한지.
수업을 시작한 지 어느덧 보름.
칠판 앞을 서성이며 아이들과 눈을 맞춰보지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은 겨우 대여섯.
미안한 마음에 아이들에게는 미리 '백기'를 들며 양해를 구했다.
"얘들아, 선생님이 나이가 드니 이름 외우는 게 마음 같지 않구나. 조금 늦더라도 꼭 기억해 낼 테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렴."
서른한 번의 봄을 맞이했어도 여전히 서툴기만 한 숙제.
하지만 나는 안다.
내가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이의 눈동자에 반짝하고 켜질 그 작은 등불의 온기를.
그 빛을 보기 위해서라도, 나의 '이름 외우기 분투기'는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필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