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걷는다.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다.
'감정의 거리'를 '물리적인 거리'로 치환시켜 버리는 그네들의 통찰력이 놀랍다.
'걷는다'는 물리적인 행위를 통해 타인에 대한 분노의 칼날을 거두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는 그네들의 지혜가 부럽기까지 하다.
제주 올레길을 시작으로 지리산 둘레길, 내가 살고 있는 김포에 있는 평화 누리길까지.
대한민국 전역에 퍼진 수많은 길들은 어쩌면 이누이트들이 걸었던 길의 한국적 변형일 것이다.
그만큼 대한민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걸어야만 삭혀지는 분노가 가득 차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15년 전 도무지 삭혀지지 않는, 나를 향한 분노를 어쩌지 못해 나는 무작정 걸었다.
방학 동안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을 홀로 걸었다.
학기 중에는 주말을 이용해 '김포 평화 누리길'과 '강화 나들길'을 걸었다.
그것마저 힘든 날이면 집 앞 호수 공원과 가마지천 천변 길을 걸었다.
그러던 중 이 구절을 만났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그 길들이 헛된 길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무척 반가웠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틈만 나면 걷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걷기' 열풍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러닝'이 대세다.
가히 '러닝 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 각지에서 각자 다양한 이유들로 달리고들 있다.
'빨리빨리'의 민족답게 걷는 것만으로는 성이 안 찼나 보다.
개인적으론 좀 안타깝다.
나는 러닝보다 걷기가 더 좋다.
러닝이 나를 '이기는' 과정이라면, 걷기는 나를' 만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영국의 작가이자 역사가인 레베카 솔닛은 그의 저서 <걷기의 인문학>에서 '걷는 동안에는 육체와 정신과 세상이 한데 어우러진다. 걷기는 영혼과 육체가 보조를 맞출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다.'라고 말했다.
니체는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라고 말했다.
장 자크 루소는 스스로를 '산책자'라고 정의하며 그의 저서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나는 걷고 있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라고 했다.
걷기는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수백만 년 동안 유지해 온 가장 자연스러운 속도이다.
이 속도에서 뇌파는 안정을 찾고,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너무 빨리 걸어서도 안된다.
북미 원주민들은 이렇게 강조했다.
'너무 빨리 걷지 마라.
네 영혼이 너를 뒤따라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잠시 멈춰 서서 네 영혼이 너를 따라잡기를 기다려라.'
빨리 걷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육체를 따라잡지 못한다는데 그보다 훨씬 빠르게 달리는 '러닝'은?
나를 이기는 걸로도 모자라 이제는 남까지 이겨야 한다.
가성비 운동으로 시작된 러닝이 어느덧 값비싼 러닝화와 러닝복을 자랑하는 전시장이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건강과 영혼을 돌보는 행위마저 경쟁의 대상으로 삼는 '경쟁 과잉' 대한민국의 현실이 씁쓸하다.
멈춰 서서 나의 영혼을 기다리는 법을 알지 못하는, 알고도 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부끄럽지만, 이쯤에서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내 영혼이 나를 온전히 따라올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러닝보다 걷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다.
1990년 고3 대입 체력검사 당시, 내가 유일하게 만점을 받지 못한 종목이 바로 '1000m 오래 달리기'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