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이상 건전하고 성실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
방송인 유정아 씨의 ‘소비에 실패할 여유’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글쓴이는 지난 시간 동안 소비에 있어 늘 ‘딱 하나만’을 강요당하는 아이의 심정으로 살아왔으며, ‘건전하고 성실하다’는 어른들의 칭찬을 동력 삼아 본인의 취향을 질식시켜왔다고 고백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마음 한구석은 아팠고, 머리는 쏟아진 밀가루처럼 하얗고 복잡했다. 오랜 시간 희미하게 내 마음속에 흩어져 있던 내 생각의 실마리를 잘 엮고 정리한 듯 말귀 하나하나가 나의 눈과 마음에 생생하게 새겨졌다. 살짝 흥분한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갈 때쯤엔 이렇게도 공감되는 글을 읽은 것에 감사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한 면이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기도 했다.
돌아보면 나 또한 지금까지 실패하지 않는 소비를 위해 나의 취향을 질식시키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남들처럼 유행하는 옷을 사보지 못했고, 꼭 필요한 것을 살 때는 유행이 지난 저렴한 옷과 신발을 골랐다. 오늘 멋있어 보이는 옷들도 내년이 되면 곧 유행이 지날 거라며 위로했다. 그렇게 내가 샀던 물건들이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뜻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지도 못했다. 항상 ‘이게 나에게 꼭 필요한지’를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소비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항상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을 바라보면서도, 적어도 소비라는 분야에서 나는 삶의 여유를 부리지 못하고 숨 가쁘게 살아온 것이 분명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나의 소비습관에 대해 천천히 떠올려 보았다. 초등학교 때는 매주 용돈 500원을 받아 200원짜리 캐러멜을 하나 사고 300원은 저금하는 것을 좋아했다. 과자를 살 때엔 항상 살 것이 정해져 있었지만 가게 안을 한참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만져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떤 물건이 새로 들어오고, 어떤 것이 없어졌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한 번쯤 가져보고자 한 것들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관심을 가질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는 간간히 용돈을 받아 매점에서 간식을 사 먹는 것 말고는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오락실을 가서도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백 원짜리 동전을 쉽사리 넣지 못했다. ‘오락은 금방 끝나는데 그럴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맴돌았다. 고등학생 때는 명절 때 받은 용돈으로 문제집과 책을 샀다. 고모들은 항상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라며 용돈을 손에 쥐어주었지만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부모님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문제집을 사거나 저금을 했다. 그리고 책을 사서 조금이라도 더 공부를 이어 나기는 것이 미래를 위한 가장 현명한 소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고 싶고, 하고 싶었던 것 대부분을 참아가며 돈을 모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돈이 어떻게 가치 있게 쓰였는지는 도대체 알 수 없다. 단지 이렇게 저렇게 돈을 써버린 것 보다야 어딘가에 의미 있게 썼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내가 처음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때였는데, 패스트푸드점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꼬박 8시간을 일해야 한 달에 50만 원을 남짓 받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 무엇이라도 하나 그동안 갖고 싶은 것을 사볼 법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의 오랜 습관은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사지 않는 것이었다. 반면 나를 위한 것을 제외하고는 쓸 곳도 많고, 써야 하는 곳이 많았다. 직장인이 되어서 소득이 많아졌을 때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20대에는 그동안 나를 뒷바라지해준 부모님을 위해, 30대에는 가족을 위해 돈을 썼다. 때로는 친구들에게 선물을 사주기도 했다. 나를 위해 소비를 하는 것보다 남을 위해 쓰는 것이 좋았다. 나는 유독 나를 위해 소비하는 것을 참고 아끼는 습관이 있었다.
친구들을 만날 때면 ‘나는 한 달에 50만 원만 있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아’라며 이야기하곤 했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회사에 머물며, 퇴근하고 나서는 밀린 집안일들을 하느라 바쁘다. 그래서 사실 굳이 뭔가에 돈을 쓰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돈을 쓸 일이 없었다. 참으로 행복하고 불편함이 없는 삶이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행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며 40대에 이르고 보니 어느새 나는 무표정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휴일에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도 무엇을 해야 될지 몰랐고, 어디를 가고 싶은지도 몰랐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해마다 새로운 것들이 넘쳐났지만 나의 세상은 여전히 회사와 집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칭찬했듯, 그동안 나의 소비생활은 충분히 ‘건전하고, 성실’ 했다. 지금에 와서 결코 그것이 잘못되었거나 후회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때는 그것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엔 마음이 쉽게 지치기도 했고,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기도 했다. 내일을 기다리는 설레는 마음이 도무지 생겨나지 않았다. 친구들은 회사일 때문에 번 아웃된 것이 틀림없다고 했지만, 나는 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 아니었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 이 상황을 벗어날 생각과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지내왔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나이를 먹게 되면 이런 지침에도 결국은 익숙해져서 일상적인 게 될 것이라 생각하며 이 시기를 그냥 지나치려고 했었다.
그렇게 녹슨 배처럼 가라앉을 것만 같았던 나의 생활은 지난 1년 동안 많이 변했다. 지금은 하루하루가 에너지 넘치는 날을 보내고 있는데, 이는 나와는 소비 철학이 조금 다른 회사 동기 박 프로를 만난 영향이 큰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덕분에 평소보다 많은 돈을 썼다고 볼 수도 있지만,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마땅히 써야 될 돈에서 단지 조금 더 보태어 썼을 뿐이다. 그 조금의 차이는 지난 수십 년간 나 스스로 벗어나지 못했던 굴레 같은 소비 습관과 무기력함을 깨어내는 시작점이 되었다. 조금은 빡빡한 소득과 지출 사이에서 숨 가쁜 ‘실패하지 않는 소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내가 즐기고 있는 하루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정확히 말하면 소비에 대한 것은 아니다. 기회비용에 대한 이야기다. 기회비용이란 여러 가능성 중 하나를 선택했을 때 그 선택으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가치를 비용으로 환산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 위를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기회비용의 가치는 따져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해야 할지’, ‘안 해야 할지’를 마음의 저울에 올려 끊임없이 따져보게 된다.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지난 2년간 새로운 소비, 어쩌면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사서 경험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해봄으로써 얻은 내 삶의 생산성과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면 음악을 듣고, 글을 쓰거나 읽는다. 퇴근 후에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들이 다양하다. 새로운 경험을 위해 쉬는 날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그런 날을 위해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무언가에 도전하기 위한 준비와 배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에너지가 넘치는 삶이다.
해보지 않고는 당신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프랭클린 애덤
삶을 중심으로 걸려 있는 기회비용의 저울 한쪽에는 해보지 않고는 열어볼 수 없는 가치의 상자가 올려져 있다. 물건을 사는 것이든, 무엇을 배우는 것이든 그것이 단지 조금의 노력과 돈을 더 들여해 볼 수 있는 것이라면 후회 없이 도전해보도록 하자. 내가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 기회비용의 저울에 올려 봤을 때 비로소 저울의 반대편에 숨겨진 보물 상자의 정확한 가치를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