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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Aug 24. 2024

여름, 떠나는 너를 예찬하며.  

여름에 대한 모든 것. 이별이 가까워왔음을 느꼈다, 이젠 안녕


안녕, 이름이 예쁜 계절아

아주 오래전, <여름 향기>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손예진 배우의 20대 초반 모습을 볼 수 있는 드라마인데, 사람이 저렇게 청초하고 맑아 보일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미모의 최전성기였다. (물론 지금도 예쁘다) 드라마는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었지만 제목처럼 여름 향기 물씬 풍기며,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여름을 상징하는 드라마가 되었다. 


드라마 제목은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짓지 않았나? 여름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예쁜데거기에 향기까지 붙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이 있을까 싶다. 물론 드라마이니 여름 향기라고 붙여놨지, 현실에서는 사실 여름 '향기'보단 여름 '냄새'에 가깝다. 불쾌한 냄새도 있지만 그런 건 쓰지 않을래. 이 글은 여름을 예찬하는 글이니까. 여름 풀냄새, 여름 공기 냄새, 여름밤 냄새. 세상에, 여름밤 냄새는 제법 낭만적이다! 오늘 밤이 여름밤이야, 어제보다 조금은 더 긴 여름밤이야. 





안녕, 길고 긴 나의 낮

길고 긴 여름을 제대로 느꼈던 건, 런던에서였다. 6월 말에 떠난 런던의 낮은 정말이지, 너무 길었다. 아침이라고 생각하고 어렴풋이 눈을 떴는데 새벽 4시 30분 정도쯤이었던걸 확인하고는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일출 시각을 찾아보니 새벽 4시 45분이니 틀린 기억은 아니었다. 세상은 이미 환해졌는데 아직 5시도 안 된 상황이라니. 


우리나라에서는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에도 일출 시각이 새벽 5시 11분이고, 일몰이 19시 57분이니 같은 시기 런던을 놓고 봤을 때 일출이 새벽 4시 43분, 일몰이 21시 21분인 거로 봐선 런던의 여름은 한국보다 훠얼~씬 길다. 

여행자에게 낮이 길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 여행지에서는 아무래도 밤보다는 낮이 긴 편이 이득이니까. 


길고 긴 나의 밝은 낮이, 이제는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를 보내는 동시에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지'를 기다린다. 6개월을 기다리는데 하지는 하루 만에 떠나버리는 무심한 녀석이다. 

하지가 떠나간 후로 한동안 낮이 길어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씩 짧아지고 있다. 동지가 오고 있는 것이다. 길고 긴 긴 밤이 한 걸음씩 오고 있다. 





안녕, 추억 소환에 무적인 마법의 단어야


<그해 여름> <한여름 밤의 꿈> <한여름의 추억> 등등 노래 제목으로도, 영화 제목으로도, 드라마 제목으로도 아주 두루두루 쓰이는 여름이다. 생각난 김에 <여름>이라는 단어로 책 이름을 검색해 봤더니 다들 여름 사랑이 대단들 하시다. 물론 봄, 가을, 겨울로도 많은 책들이 나오지만 한 봄의 추억, 한가을의 추억, 한겨울의 추억이라는 말이 유명하지 않은걸로 봐선 여름이라는 단어가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는 게 틀림없다. 



진짜 그렇다, 작가님들은 여름을 정말 좋아하나봐. (교보문고 검색 이미지)




누구든 저 단어를 보면 각자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그리곤 '아 아름다웠던 그 시절이여~' 라거나, 'OO아, 잘살고 있냐?' 라거나. 오랜 기억의 서랍 속에 몰래 숨겨둔 나만의 비밀 같은 거 말이다. 

<그해 여름, 우리는 뜨거웠다>라는 문장을 어디선가 얼핏 본 기억이 있는 거 같기도 하지 않은가? 우리를 잠시나마 감성에 푸욱 빠지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들, 여름이 가지는 힘이다. 


나는 지브리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지브리 OST. 글을 쓰며 들을 요량으로 클릭해서 댓글을 보면 지브리 특유의 청량감과 여름 감성이 좋다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지브리 자체의 감성도 있겠지만 지브리를 처음 접했을 시기가 대부분 학창 시절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면, 시절에 대한 향수가 겹친 영향도 있을 같다. 지브리를 보던 나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같은 아련한 감정이 지브리에 묻어있는 게 아닐까. 


이런 청량함을 정말 좋아한다 



안녕, 매미.  안녕, 나의 뜨거웠던 여름. 


따릉이를 타고 집에 오다가 문득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기 전인 7월 초중순 정도까지만 해도 자전거로 출퇴근했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한동안은 버스를 타느라 미처 눈치 채지 못했었다. 


나무는 우거졌지만 조용했다. 아마 매미 한 마리가 울지 않았다면 나는 끝까지 그들을 이젠 보내줘야 할 때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스트루르르르 스트루루르르. 녀석 유난히도 우렁차게 우는구나. 그래 몇 년을 땅속에서 있다가 한 철 살다 가는데 목소리라도 크게 내야지. 얼마 남지 않은 네 생이 억울하지 않도록 목청껏 너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렴.


아침에 창문을 열면 바깥을 가득 채운 소리는 다름 아닌 매미들의 울음소리였는데, 이젠 정말 조용해졌다. 갔네 갔어, 매미가 가버렸다. 

그리고 이제, 여름도 간다. 간다, 가. 나의 여름이 간다. 안녕. 

                    


여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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