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지 못했던 순간을 포착하다
여행의 재미를 조금씩 알아갈 무렵, '나의 여행에서는 해가 쨍쨍 내리쬘 만큼의 맑은 날씨가 가장 중요해!'라는 생각이 자리잡아 갔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얼굴에 바른 파운데이션이 땀과 함께 녹아 내려도, 눈에 바른 마스카라가 땀에 젖어 눈가를 검게 만들지라도 말이다. 맑고 파란 하늘을 카메라에 담는 순간순간을 즐겼다. 도시의 번잡스러움을 벗어나 자연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여행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비를 만날 확률도 늘어난다는 매우 당연한,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그런 내용이었다.
'오늘 너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없을걸?' 이라며 잔뜩 약을 올리고 싶었을까? 파란색이어야 할 하늘을 회색 먹구름이 완벽하게 가려버린 날의 여행은 약간의 짜증이 항상 함께했다. 최악은 비가 오는 날씨였다. 왼손에는 우산을, 오른손으로는 카메라를 들고 내리꽂듯이 쏟아지는 비를 피해 여행을 즐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운동화의 앞부분에 물이 스멀스멀 들어오기 시작하자 불쾌지수가 한달음에 치고 올라갔다. 내게 비가 오는 날 하는 여행은 집에서 빈둥거리는 일보다 못한 일이었다. 행여 비가 올까, 여행 일정을 계획한 일주일 전부터 매일 날씨를 확인하며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 춘향이와 몽룡이. 비오는날 보고 있으니 약간 무서웠다. 사진 찍을 때는 몰랐는데, 찍고나서 보니 날씨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듯 해서 웃음이 났다. 본래 용도는 햇빛가리는 용도였겠지만, 이 날은 비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남원의 명물, 남원 추어탕. 싸늘해진 두 손을 녹혀줄 따뜻한 국물 한 숟가락에 피로가 풀리는 듯 했다. >
2012년에 여수에서 잠시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돌이켜보니 2012년은 맑은 날과 흐린 날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의 매력에 흠뻑 취해있던 시기였다.
여수에서 3개월간 생활하는 동안, 이때가 아니면 언제 남도(전라남도, 경상남도)를 자주 여행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휴무일에는 근처를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하지만 큰 걸림돌이 있었으니, 장마라는 녀석이었다. 남도의 장마는 서울의 그것과는 성격이 매우 다른 녀석이었다. 변덕도 심하고, 어찌나 몸집이 큰지. 서울에 찾아오는 장마에는 장맛비라는 이름을 붙여주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남도의 장마는 무섭고, 지독한 친구였다. 나를 아주 제대로 골탕 먹였으니 말이다.
2박 3일간의 하동여행을 마치고 다시 여수로 돌아가던 기차에서였다. 아직 채 마르지 못한 신발에서 구린내와 비슷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햇빛은 3일 내내 구경도 못 할 만큼 줄곧 비가 내렸기에, 하루 내내 돌아다니며 젖은 신발을 말릴 수가 없었다고 어설픈 변명을 해볼까.
말하기 창피하지만 정말 지독한 냄새였다. 당장에라도 열차에서 내리고 싶었으나, 오후 근무 조였기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무조건 이 열차를 타고 순천까지 가서 다시 여수역행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짧지만 긴 여정을 마쳐야 했다. 하동에서 순천까지 가는 30분도 안 걸리는 시간이 무척이나 괴로웠다. 콧속을 후벼 파고 들어오는 이상야릇한 냄새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욱 큰 문제는 주변 사람들이 이 끔찍하고도 강렬한 냄새를 맡아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정체된 공기를 타고 조용히, 하지만 치밀하게 기어 올라오는 신발 냄새에 쥐구멍이라도 만들어서 들어가고 싶을 때였다. 건너편에 앉은 남자가 자신의 주변을 킁킁거리며 훑기 시작했다.
'앗, 내게서 나는 냄새를 드디어 맡았나 보다. 어떻게 하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적절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맙소사. 나는 순천역까지는 가야 하는데. 사람이 당황하니 판단력이 제 능력을 펼치지 못하나 보다. 열차와 열차를 연결해주는 사이에 있으면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을, 어처구니없게도 그날 밤 방바닥에 누워 생각해냈다.
그는 자신의 발 아래 쪽을 중심으로 주변을 살폈는데 결국 내 쪽까지는 시선을 돌리지 못한 채로 탐색을 마쳤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범인은 당신이 아니고, 저예요. 미안해요. 괜한 오해를 하게 만들어서.
다행일까, 불행일까. 내 옆에는 수녀님이 앉아계셨는데, 그분은 종교의 힘을 빌려 이 고약한 냄새를 해탈하셨는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다. 어느 자리에 앉은 승객까지 이 냄새를 맡았을지는 모르겠다. 이 칸의 모두가 지독한 코감기가 걸려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렇게 하동에서 여수까지의 짧지만 긴 여정을 마치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을 거라 믿은 채로 여수역에서 내렸다. 참 고약한 여행이었다.
< 연둣빛의 잎사귀가 빗물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보고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수국. 소박하면서도 풍성한 느낌이 좋다.>
< '내리는 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빗방울음 머금고 있는 꽃을 바라보는게 아닐까 >
비 오는 날의 매력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사찰 덕분이었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산속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천 선암사를 갔던 날에 우연히 비가 내렸고, 산자락에 걸린 하얀 구름과 사찰의 전각들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신선이라도 된 듯 했다. 연기처럼 가볍게, 스르르륵 퍼져나가는 구름이 멋스러웠다. 벤치에 앉아 한참을 쳐다보다가 사진으로 담았다가, 다시 눈으로 담았다가.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그제야 깨달았다. 비 오는 날만 볼 수 있는 풍경이란 걸.
그 후로 '비 오는 날의 사찰은 최고의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장소'라는 말을 왕왕하고 다녔다. 비 오는 날에 떠나는 여행은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라고 말하고 싶다.
꽤 멋진 풍경을 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
비 오는 날을 끔찍스럽게 싫어했던 내게 변화가 생겼다. 비 오는 날도 그 나름의 분위기가 있고,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말이다.
때로는 매섭게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나무의 너그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꽃잎 가득 머금고 있는 빗방울의 투명함을 만질 수 있었다. 비가 그치면서 산언저리를 잠시 쉬어가는 비구름의 여유로움을 볼 수 있었다. 바닥에 잠들어 있는 물을 깨우듯이 퐁, 퐁, 퐁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빗방울을 다리 삼아, 더욱 짙게 퍼져나가는 풀 내음. 그 싱그러움을 맡을 수 있었다.
비 오는 날의 여행, 그것은 또 다른 기쁨이었고 행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