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야, 우리에게도 봄이 왔구나

by 희재


벚꽃을 닮았으나 벚꽃처럼 야단스럽지 않고

배꽃과 비슷해도 배꽃처럼 청승스럽지 않아 좋습니다

[일지매, 1화 내용 중]


몇 년 전 방영했던 일지매라는 드라마를 보며 매화에 관심이 생겼다. 벚나무보다 크지 않은 키, 굳게 다문 입술처럼 가지에 야무지게 붙어있는 꽃잎을 보고 있으면 ‘참 실하다’라는 말이 떠오르곤 했다.

작지만 자기의 몫을 다 해내고 있는 듯 야무지고 당찬 모습이 보기 좋았다. 붉은 꽃잎, 하얀 꽃잎, 분홍 꽃잎 등 색색의 꽃잎이 봄이 찾아왔노라, 나의 귓가에 속삭였고 나는 그네들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어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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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광양 매화 축제가 하도 유명하다 하여 호기심 반, 설렘 반으로 광양으로 떠났다. 광양 매화마을까지 가는 다양한 방법이 있었는데, 하동 터미널에서 내려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걷는 길도 괜찮다 하여 나는 그 방법을 택했다.

광양 터미널보다는 하동 터미널이 더 익숙한 장소였고,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걷는다는 표현이 꽤 서정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섬진강에 관련된 많은 문학 작품들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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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터미널을 나와 만난 개. 너처럼 잘 생기고 늠름한 개를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IMG_1368.jpg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버스정류소 표지판. 왠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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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과 전남 광양을 잇는 섬진교, 그리고 섬진교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

IMG_1387.jpg 전라남도가 눈 앞에 보인다!!


경상남도에서 전라남도로 이동하는데, 교통수단이 아닌 나의 두 발을 이용한다는 사실이 왠지 국토대장정을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무려 한 개의 ‘도’에서 다른 ‘도’로 넘어가는 여정인데, 도보로 이동하다니! 실제로는 5km 정도의 길이었지만 두 개의 도를 넘나드는 그 길이 한때 도보여행을 계획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매력적인 코스였다.


섬진강에는 재첩이 유명하단다. 나는 그곳에서 ‘재첩’이라는 단어를 처음 보았고 모양새를 처음 보았으며, 처음 맛보았다. 흡사 크기가 작은 조개 같았다. 맛은 특별하지도, 낯설지도 않았다. 뽀얀 국물에 익숙한 시원함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진짜 섬진강에서 잡는 재첩으로는 충당이 되지 않아 중국산을 많이 사용한다고 했다. 아마 내가 먹은 ‘7천 원’ 재첩국도 중국산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꽤 한참을 걸어야 했다. 아무도 걸어가지 않았다. 도로에는 쌩-소리를 내고 내 옆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체력이 고갈됨에 따라 내뱉는 나의 숨소리만이 있었다. 버스를 타는 편이 현명했을까. 아니야, 천천히 걸어가면서 보는 풍경은 차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는 또 다른 멋이 있지. 라며 떨어져 가는 체력을 부여잡았다. 아, 이 저질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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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1408.jpg 천천히, 한 숨 쉬고 가세요
IMG_1411.jpg 매화나무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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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섬진강을 따라 걷는 풍경은 여유롭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묻어있었다. 군데군데 매화가 하늘을 향해 피어있었고, 본격적으로 매화마을에 들어가기 전, 애피타이저를 먹듯이 매화에 조금씩 스며들어 갔다.

매화마을에 도착하는 과정은 고되었으나, 매화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활짝 핀 매화처럼 미소가 얼굴에 퍼졌다. 호사스럽지 않고 야무진 모습이 좋았다. 담백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이 좋았다. 글귀와 어우러진 매화나무 한 가지가 참으로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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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실이 담겨 있는 장독대


매화나무가 가득한 길을 걷고 있으니 봄이 왔구나, 싶었다. 겨우내 잘 견뎌주었다, 모진 바람과 외로운 시간을 잘 버텨주었다. 덕분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 사람들에게 봄을 선물해주는구나. 고마운 마음에 시선을 오래도록 남겨두었다. 보고 싶었다, 매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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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해는 유난히도 매화에 흠뻑 취했던 해였다. 광양 매화마을을 시작으로,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의 매화까지 보았기 때문이다. 광양 매화마을은 ‘매화 마을’ 이름답게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고, 병산서원의 매화나무는 딱 한 그루, 그 한 녀석이 옹골지게 피어있었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처럼 사람들을 맞이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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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산서원의 만대루를 배경으로 피어있는 매화꽃은 참 ‘한국적’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소녀가 치맛자락이 끌릴까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놓는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서원이었기에 고운 소녀가 아니라 건장한 소년이 자리 잡고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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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꽃들도 피어있었지만 나는 매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많이 보았어도 질리지 않음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매화에 빠져 있다. 참 묘하게 매력적인 꽃이다. 게다가 꽃이 지고 난 후에 맺는 열매, 매실로 만든 반찬이라면 다른 찬은 필요 없이 밥그릇을 비워내니, 매화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나 보다.

폭설이 내려온 세상이 하얗다 못해, 강원도의 어느 동네에서는 자동차들이 눈에 묻히기도 했다는데. 그 겨울이 갔고, 어느덧 3월이 왔다. 또다시 매화는 꽃잎을 피우고, 봄이 왔음을 알리겠지.


봄이다, 봄.

매화야, 한결같은 매화야, 우리에게도 봄이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