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이 내려와, 우리의 두 손에

겨울바람이 매섭던 날, 가평 오색별빛정원전을 다녀오다

by 희재


# 책 한 권에서 시작되었다

찬바람에 싸늘해진 두 손을 녹여볼까 하여 중고서점을 잠시 들렀다. 우연히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는데, 아침고요수목원의 이영자 원장이 쓴 '아침고요정원일기'라는 책이었다. 가평 아침고요수목원의 유명세는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경기도와는 친하지 않았다. 서울에 거주하면서도 경기도 여행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 날 그 책을 만난 건 하늘의 뜻이랄까, 이제 경기도와 친해질 때가 되지 않았니? 라는.

아침고요 정원일기. 꾸밈없이 진솔한 느낌이 좋았다.


담백하고 솔직한 글이었다. 식물을 대하는 원장의 따뜻한 시선은 덤으로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름은 몰랐던 꽃들이 등장할 때면, 꽃 이름을 알아냈다는 것이 기뻤고 한겨울에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음이 즐거웠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아침고요수목원에 대한 호기심도 커졌다. 책을 덮고 난 후에는 '그래, 이번 기회에 가봐야겠어'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있겠지만, 겨울밤을 화려하게 수놓을 오색별빛정원전을 위안 삼아 가평으로 떠나기로 했다.


# 그 곳엔 눈이 쌓여있었다.

그 날 밤은 눈이 오지는 않았지만 제법 쌀쌀한 날씨였다. 강원도라 더욱 그러했을지 모르겠다. 내린 눈이 고스란히 쌓여있을 정도였으니까. 핫팩을 배에 붙이고 손에도 쥐었지만 낮아진 기온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아, 괜히 왔나 싶었다. 약간의 후회가 들기 시작할 때쯤 앙상했던 가지들에 별빛이 피어났다. 반짝반짝. 반딧불이 같기도 했고 작은 별 같기도 했다.

"와 예쁘다!"

그 짧은 순간에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라는 생각이 후회를 밀어내고 자리 잡았다. 고 짧은 틈에 말이다.

하얀 눈이 나뭇잎을 덮어주고 있었다. 추운 겨울 함께 나보자며 나긋하게 말하면서.



# 우리가 함께 하는 밤이 아름다워졌어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고 빛은 자신의 존재를 더욱 뽐내기 시작했다. 이에 맞추어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을 남기려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여기에 서 봐, 찍는다! 하나, 둘, 셋!”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경쾌한 웃음소리와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끊이질 않았다. 털모자에 귀마개, 털장갑으로 무장한 아이들도 불빛을 따라 뛰어다니기 바빴다. 제아무리 추운 날씨라지만 눈 앞에 펼쳐진 황홀한 광경을 감상하기 위한 의지는 꺾지 못했나 보다.

돌아다닐수록 영화 속의 한 장면에 들어온 것 같았다. 영화 아바타 속에 등장할 법한 나무 앞에선 특히 그러했다. 나무 가득 빛나고 있는 파란 빛을 보고 있자니 몽롱한 느낌마저 들었다. 버드나무의 흐드러진 나뭇가지에도 노란 불빛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큰 나무들 앞에서 사람들은 빠짐없이 사진을 찍었는데, 안타깝게도 배경에 묻혀 얼굴이 잘 나오지 않는 듯했다.


“얼굴이 안 보이잖아?”라고 약간의 투정을 부리는 아주머니도 있었고 “괜찮아, 나는 중요하지 않아. 배경만 잘 나오면 돼.”라며 시원스럽게 하나를 포기할 줄 아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나는 후자였다. 내 얼굴 나오자고 배경을 날려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 사랑해, 사랑해, 내 곁의 당신을 사랑해

집안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바꿀 수 있는 쉬운 방법의 하나는 촛불을 밝히는 것이다. 불빛을 담아줄 예쁜 그릇이 있으면 더욱 좋고. 촛불 몇 개만으로도 낭만이 흐르는 밤이 된다.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화려한 불빛 속에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도 낭만을 즐기는 듯했다. 소녀처럼 순수한 얼굴로 어떻게 하면 사진에 더 예쁘게 담길까, 고민하며 자세를 취하는 중년의 여성이 그러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옆을 지켜줬을 부인과 어여쁜 숙녀가 된 딸을 양옆에 둔 아버지도 그러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러했다.


사랑스러운 조형물들이 분위기를 더욱 무르익게 한다. 내 옆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의 손을 꼭 잡는다. 조용히 속삭인다, 사랑해.


이 순간의 모든 감정이 말이야,

우리가 훗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을 즈음,

추억 속에서 꺼냈었을 때 오늘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으면 좋겠어.

우리의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벚꽃길이 떠오르는 '사랑의 터널'.


# 겨울에 피는 꽃 중에 제일 화려한 꽃

어디선가 보았다. 나무에 전구를 매달고 불을 켜는 것이 나무에는 좋지 않다고. 해마다 겨울이 되면 밝게 빛을 내는 나무들을 보며, 안쓰러운 마음과 예쁘다는 생각이 뒤엉켰다. 사실 눈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도 불편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이 너희들을 너무 많이 아프게 한 것은 아닐지. 아니면 이렇게라도 겨우내 외로울 너희들 곁에 사람들이 들러주는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스스로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다만 나보다 식물 전문가인 분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해주셨을까, 라고 어설프게 위로했을 뿐.

다행인 것은 나무에 직접 전구를 설치한 경우가 많지 않아 보였다. 나무가 아니라, 구조물을 만들어서 전구를 달아놓은 것들이 많은 듯했다. 사람 키보다 훨씬 큰 꽃들이 예쁜 빛을 자랑하며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솜뭉치같이 동글동글해, 알사탕 같기도하고.

잊지 못할 시간을 보냈다. 인생 사진이라고 불릴만한 사진도 남겼다. 추억의 한 페이지를 기록했다.


지금 내 곁의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추운 겨울 동안 따뜻한 순간이 필요하다면 오늘은 고백해볼까


우리 오늘 조금 더 특별한 사이가 되어보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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