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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an 16. 2017

그의 달콤한 Kiss에서 시작된 이야기

클림트 인사이드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하여


구스타프 클림트. 그의 이름이 왠지 익숙한 듯 낯설다면, 그의 작품을 본다면 어떻게 느껴질까? 황금빛을 배경으로 남녀가 키스를 하는 작품은 본다면 그의 이름이 조금은 친숙하게 다가올 수 있을까.


내가 클림트에 관심을 두게 해준 작품은 키스였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접했을 뿐인데 그림 속 여자의 발그스레한 볼을 보고 있는 나의 두 볼이 따뜻해지곤 했다. 그림은 신비로웠다. 멈춰있지만 살아 움직였고, 조용하게 나를 이끄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빈의 벨베데레궁전. 클림트의 키스를 실제로 볼 수 있다.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있으니, 주의.

기분 좋은 힘에 끌려 빈을 여행했고 거기서 키스를 두 눈에 담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실제로 본 키스는 기대치를 충족시키고도 남았다. 어둠에서 황금빛 배경은 화려하게 빛났고, 여자의 표정은 황홀했다. 여자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남자의 긴 손가락도 마음에 들었다. 한때는 손이 예쁜 남자가 이상형이던 때가 있었다지. 한참을 서서 그토록 갈망했던 순간을 채워 넣었다.

클림트 인사이드 전시의 키스. 벨베데레 궁전에서 봤을 때 배경에서 황금빛 별빛이 내려온다, 고 느꼈는데 이번 전시에서 정말 별빛이 내리게 구성을 해놓았다.




키스에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서울 성수동에서 클림트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실 '여행' 카테고리 안에 이 글을 넣을까 말까를 고민 했다. '이러한 전시를 보고 왔고, 느낌은 어떠했다'를 기록한다면 왠지 여행 카테고리와 맞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클림트'라는 다리로 비엔나와 서울 성수동을 연결시킨다면 조금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적인 공간은 다르지만, 클림트를 담고 있는 의미의 공간은 같은 곳이었다.    

 

물론 나는 미술사나 디자인 전공은 아니기에 지식의 깊이가 깊지 않다. 그럼에도 미술 전시회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내가 지금은 볼 수 없는 시대의 모습을 그림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클림트 인사이드를 찾아보니, 실제 작품을 가져온 것은 아니고 미디어 아트 형식의 전시였다.미디어 아트전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이맘때쯤에 ‘고흐 인사이드: 빛과 음악의 축제展 ’에서였는데, 생소하지만 새로운 접근 방법이 신선했다.      


미디어아트 전시의 여러 장단점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 보자면(물론 지극히 주관적으로) 가장 큰 장점은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림을 만날 수 있음이 아닐까 싶다.  


‘전시회’나 ‘미술’은 우리나라에서 아직은 지루하다고 생각하거나 가볍게 즐기기에는 부담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에는 미술관의 조용하고 때로는 엄숙하기까지 한 분위기와, 전시품들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비싼 돈 주고 모처럼 문화생활을 즐기니까 최대한 유익한 시간을 가져야지!’라는 생각으로 도슨트와 함께하는 해설을 들어보지만 그때뿐이다.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 바쁘다. 그저 그 순간에 충실히 임했다는 사실에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


< 여성의 시작부터 치명적인 팜프파탈의 모습까지 담아내고 있다.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벤 유디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작품 '유디트', '다나에' 등을 구성해놓았다.>



하지만 이렇게 음악과 영상으로 보여주는 전시는 무겁지 않고, 쉽게 다가갈 수 있다. TV나 동영상에 익숙한 요즘 세대들에게는 이게 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겠다. 살아 움직이는 그림들을 보며 어린아이들이 관심을 보인다.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설명을 해줄 기회이고, 아이들은 ‘공부’의 개념보다 재미있는 그림 놀이로서 미술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학생이나 성인에게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여줌으로써, 다양한 작품들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게 한다. 이는 작가가 해당 작품을 그릴 때 어떤 환경에 처해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 음악과 움직이는 그림들은 지루함 대신 호기심을 자극한다. 클림트가 담아내고자 했던 세상을 이루고 있는 주변의 모습들. >





하지만 미디어아트전시에서 누릴 수 없는 가장 큰 혜택은,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곱씹을 기회가 허락되지 않음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가까이에서 봤다가 멀리서 봤다가 하며 작품을 충분히 느끼는 즐거움이 전시회를 찾는 이유 중 하나임에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전시회를 통해 가질 수 있는 사색 시간이나, 캔버스에 표현한 실제 크기와 물감의 질감 등을 접할 수 없다.  작품의 실제 크기를 직접 눈으로 보는 경험은 사람에 따라서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여기에 꽤 큰 비중을 둔다.      


클림트 <죽음과 삶>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하면,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최대한 작가의 생각을 느껴보려고 노력한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등등. 인터넷이나 도록을 찾아보며 좋아하는 작품 목록을 하나씩 채워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

물감의 질감과 붓터치의 느낌은 실제 작품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작가가 해당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바는, 실제 작품을 보는 행위를 통해 읽어낼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위의 작품은 클림트의 <죽음과 삶>이라는 작품이다. 빈의 레오폴드 미술관에서 인상 깊던 작품이었는데 화려한 색상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작품의 크기에서 오는 압도감과 제목이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가로 198.1cm 세로 177.8cm의 큰 그림 앞에 발걸음을 멈추니, 죽음의 공포와 삶의 에너지를 마주한 듯했다. 죽음과 삶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과정을 한 폭의 그림에 온전히 담아낸 클림트. 삶과 죽음은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 삶은 기쁨과 고통이 공존한다는 진리를 그림을 통해 말해주고 있었다.


만약 이 작품이 A4용지만 한 크기에 그려졌다면 혹은 미디어 아트전을 통해서였다면, 죽음의 공포와 삶의 의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겠다. 2m 가까이 되는 커다란 크기가 주는 위압감이 죽음이라는 주제와 잘 맞아 떨어졌기에 보는 사람에게 숭고함마저 느끼게 할 수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고 멈춰있는 작품이기에 꼼꼼히 살펴보며 작가의 생각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클림트 인사이드를 다녀와서 몇몇 사람이 나에게 물었다. "전시회 어땠어요?"라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떠했다는 느낌보다 "미디어아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요."라는 말을 먼저 했다. 실제 작품을 보는 줄 알고 방문했다가 디지털로 작품을 본다면 당황스러울 테니까. 미디어아트 형식에 대해 간략하게 내가 느낀 장단점을 말해주고, 판단은 스스로 하도록 맡겼다.


누군가에게는 정적인 미술관보다 동적인 미디어아트 전시회가 더 맞을 테고, 어느 누군가에게는 실제 작품을 곱씹어 담을 수 있는 전시회를 더 선호할 것이다. 무엇이 더 나은지는 각자의 판단이다.


다만 다양한 형식의 전시를 보면서,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가는 여정이 꽤 흥미로운 여행임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만이 여행이 아니다. 때로는 나보다 먼저 살다간 사람이 담아놓은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발걸음이 의외의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서울에서 유럽을 느낄 수 있는 손 쉬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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