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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Aug 29. 2016

프라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네 가지의 이야기.

11월에 프라하에 갔을 때는 별로였어. 해도 빨리지고 춥고, 휑한 도시였다고.
 나는 별로 추천하지 않아


프라하 여행 계획을 세웠던 내게 지인은 저렇게 말을 했다. 여행을 하고자 하는 시기는 4월 초였다. 이른 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흔히 말하는 '5월의 싱그러움'은 느낄 수 없는 시기였다. 11월과 4월 초의 날씨는 별반 다르지 않을 듯싶었다. 때문에 저 말을 듣고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한정적인 금액과 시간은 유럽에서 보다 효율적인 동선을 고려하게 만드니까.


하지만 무엇에 이끌렸던 것일까? 꽤 오랜 시간을 고민했으면서, 마치 단 한순간도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이 프라하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을 마친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4월의 프라하를 사랑하고 있었다. 내가 프라하를 사랑하게 되었듯이, 프라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프라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하나.

# 가이드에 대하여


가이드에 대한 만족도 때문에 현지 투어를 즐기지 않는 내게 지인은 팁 투어를 추천해주었다. 유사업종에 종사하며 '가이드'라는 직업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기에, 나는 현지 투어를 마냥 좋게만 보지는 않는다. 가이드로서 많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사람을 상대한다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고, 때로는 단체 활동과는 맞지 않는 사람도 상대해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그들의 운명이었다.


몇몇 가이드는 그런 생활로부터 오는 슬럼프를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가이드 본인이 지치게 되면 그가 이끄는 투어는 자연스레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질 낮은 투어를 받는 것은 여행자에게도 매우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여행지에서 만나는 가이드 투어는 '복불복'인 것이다.


하지만 걱정했던 시간이 무색할 만큼 내가 만났던 두 명의 가이드는 진정으로 프라하를 사랑하고, 본인의 직업을 사랑하는 가이드들이었다. '프라하'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진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했고, 프라하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들의 진심을 간직하고 싶었던 한 명의 여행자, 내가 만들어갔던 프라하에서의 하루였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말을 좋아하시던 가이드와 함께 한 순간.



프라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둘.

# 자주독립국가를 꿈꿔왔던 분들에 대하여

오베츠니 둠의 발코니. 1918년, 이 곳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조금 얘기하자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지배를 받았다. 무려 35년이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는 너무나 많다. 역사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많고. 35년이라는 세월 동안 생긴 아픈 상처는 완전히 치유되지 못했다. 고름을 짜내고 상처를 치료할 틈도 없이 강대국들의 이권 싸움이 개입되면서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니까.


체코는 보헤미아 왕국이었던 시절부터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아왔다. 600여 년의 오랜 지배를 벗어나고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을지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과거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랬던 그들이 식민사관을 깨고, 민족의식을 함양하기 위해서 오베츠니 둠을 짓고 이 발코니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우리나라가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아시아에서 1919년 3월 1일을 보냈던 그분들도, 유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 대항했던 그분들도 모두 자주독립국가를 향한 꿈은 같았을 것이다.


오베츠니 둠의 야경.
붉은색 건물은 오베츠니 둠의 맞은편에 있는 팔라디움 백화점이다. 영화 뷰티인사이드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프라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셋.

# 존 레넌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프라하의 시민들에 대하여  

존 레논의 벽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존 레넌의 벽'이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먼저 드는가?

존 레넌이 왔다 갔던 곳인가? 존 레넌이 그림을 그려놨나? 존 레넌이 만든 곳인가? 비틀스가 이 곳에서 노래를 불렀나? 등등 존 레넌과 관련된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올 것이다.


안타깝게도 모두 틀렸다. 존 레넌의 벽은 위의 추측들과 전혀 관계가 없다. 체코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상을 반영해줄 뿐.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미국과 소련은 세계 권력 장악을 위한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냉전체제가 지속되었고, 세계정세는 불안했다. 이에 평화, 사랑, 인류애 등을 향한 사람들의 열망은 강해져 갔다. 이들을 위로해주었던 것은 음악이었다. 그것은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대표적으로 비틀스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데, 체코 사람들 역시 비틀스의 음악을 들으며 힘든 현실을 버텨나갔다.


하지만 비극이 찾아왔다. 바로 존 레넌의 피살 소식이었다. 존 레넌의 죽음은 체코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했다. 감히 짐작하건대 힘들게 부여잡고 있던 희망의 끈을 놓쳐버린 기분이지 않았을까? 내가 자주 쓰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아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것이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죽은 존 레넌을 생각하며 후미진 벽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낙서는 살아있는 생명처럼 벽으로 번져나갔다.


공산주의 정권은 밤마다 이 낙서를 지우기에 바빴다. 때로는 낙서를 하고 있던 청년들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프라하 시민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과 의지까지는 꺾지 못했다. 계속해서 자유를 열망하며 낙서를 해나갔던 것이다. 때로는 존 레넌의 벽 맞은편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으로 몸을 피하면서 까지 낙서를 지속했다. 프랑스 대사관은 프랑스의 영토로 속해있기 때문에 이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프랑스 대사관의 모습. 이 곳에 숨으면서까지 낙서를 할만큼 프라하의 시민들은 자유를 열망했다.

가이드의 말씀을 빌리자면, 존 레넌의 벽은 매일매일이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새로운 낙서를 하기 때문에,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모습이 다를 것이란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벽이다.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여행자들이여, 이 곳에서는 마음껏 당신의 흔적을 남겨도 된다. 그 낙서 또한 오늘의 역사가 될 테니, 살아있는 역사에 동참을 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독도는 우리땅!!! 독도는 우리땅!!! 독도는 우리땅!!!


알록달록한 벽을 배경으로 예쁜 사진을 찍으면서, 한 번쯤은 생각해보자. 이들이 꿈꿔왔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프라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넷.

# 프라하를 사랑하게 된 나에 대하여


프라하를 오기 전까지 나는 알지 못하였다. 이 곳에 왜 그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오는지. 왠지 모를 우울함과 어두운 모습을 갖고 있을 듯한 동유럽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프라하에서 현지인들과 호흡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프라하는 파리처럼 화려함은 없었지만 담백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작지만 강한 도시였다. 유럽이라는 낯선 대륙에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의 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도시였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가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게 해 준 도시였다.


그렇게 나는, 프라하를 사랑하게 되었다.




프라하 여행기 마칩니다. 부다페스트에서 다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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