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재 Dec 04. 2018

파리에서 본 나의 미래

# 미래.  [ 파리 , 프랑스 ]



정지된 ‘사진’으로 보면 유럽에서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운 도시, 하지만 내가 들어가 존재했을 때는 실망을 감출 수 없던 도회지. 파리였다.


다채로운 빛으로 화려하게 치장했지만 한 겹 벗겨내 보면 시멘트의 속성을 그대로 닮은 곳. 속살은 차갑고, 경직되어 있던 공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기보다는 루브르를 집 삼아 모나리자가 살아간다는 느낌이 강했던 장소. 사람의 온기보다 골목길 구석구석 불쾌한 냄새가 먼저 나를 맞이해주었기에 썩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들.

천덕꾸러기 신세에서 지금은 랜드마크로 ‘철생역전’을 한 에펠탑을, 그래도 한 번은 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떠났던 프랑스의 수도.


그럼에도 파리를 추억하는 이유는, 무미건조함 속에서 ‘내가 바라는 노년의 모습’이라는 이름의 싹을 본 까닭이었다.






밤보다 낮이 길었던, 창틀에 놓인 예쁜 꽃이 삭막하지 않아 좋았던 한여름의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완연히 퍼져 있는 예술가의 기운을 느끼며 발걸음이 가자는 대로 걸었다. 지도를 정확하게 읽지 못하는 이유가 가장 컸고, 갈림길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걷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동서남북이 표시된 지도보다 ‘맘대로’ 나침반이 인도하는 지도와 친한 덕분에 여행을 준비하며 “꼭 가봐야지!” 했던 곳을 못 가는 경우도 있고, 대신 예상치 못했던 명소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가이드북에는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는 곳 말이다.


‘Musée de Montmartre’라고 했다. 박물관(혹은 미술관)이라기보다는, 잘 꾸며진 정원 같았다. 르누아르, 고흐 등이 실제로 머물렀던 곳이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담한 연못에 수련이 소담하게 피어 어느 외국인의 시선을 빼앗았다. 성공했다, 고놈. 훈훈한 외모의 남자가 카메라까지 대동해서 오롯이 너에게만 집중을 해주잖니? 




내 시선은 어디에서 멈추려나. 눈길 가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 노부부에 이르렀다. 나는 왜 이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걸까? ‘부러움’ 때문이었다. 서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족이자, 어쩌면 삶의 이유일 사람과 함께 하는, 매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게 부러웠던 거다.


맞은편 벤치에 몸을 올려놓고 가만히 두 분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의 두 손에는 책이 있었고, 책장이 이편에서 저편으로 느릿느릿 옮겨가고 있었다. 멈춘 시간 속에서 할아버지의 눈과 손, 종이만이 천천히 흘렀다. 할머니는 네모난 책에 머물렀다가, 꽃과 나무에 머물렀다가, 마지막은 할아버지의 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다.



모자 바깥으로 보이는 흰 머리카락과 깊게 파인 주름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주름살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부부는 무슨 대화를 주고받았을까. 언제부터 서로의 인생에서 머무르며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어갔던 걸까. 눈에 보이는 흰머리만큼이나 오래된 사진부터 시작할지도, 아니면 선명한 디지털 이미지로 존재하는 사진부터 시작할지는 모를 일이다.


중요한 건 이뿐이다. 그저 체력이 허락하는 최대치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 만큼만, 한 번씩은 멈춰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걸, 이미 오래전 깨달았을 법한 두 분의 감정을 내가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 그것이었다. 




나는 ‘오늘’에 얼마나 집중하고 살아왔을까.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내일을 보험 삼아 오늘을 무의미하게 보내지는 않았을까. 함께 하는 소중한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교감하는 시간을 잊어버리고, 또 잃어버린 채 살아오지는 않았을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그 순간을 즐기는 일이었으리라. 훗날 서로에게 서로가 없더라도 남겨진 사람은 행복한 기억을 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와 그와 쌓아온 젊은 날의 추억을 행복하게 회상하시는 나의 할머니처럼 말이다.  


차갑기만 하던 파리에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사람 냄새, 사람 온기였다. 우연히 만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서,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더 적은 수의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며, 가족이나 오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데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무엇을 하는 것보다 존재하는데, 그리고 미래보다 현재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아툴 가완디 저, 김희정 역, 부키, p.150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가설이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중략) 그러나 삶의 시야가 축소되어 눈앞의 미래가 불확실하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삶의 초점은 지금, 여기로 변화하게 된다. 일상의 기쁨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로 옮겨 가게 되는 것이다.

위의 책, p.155~156



가장 가까운 사람을 기억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






작가의 이전글 그 사랑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