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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Nov 24. 2018

그 사랑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

# 사랑.  [ 베로나 , 이탈리아 ]




로미오와 줄리엣이 다시 만난 건 베로나의 어느 골목에서였다. 대충 세어도 15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였다. 긴긴 시간의 공백은 얼굴을 변하게 했고, 변해버린 얼굴은 분위기를 바꾸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알아봤고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네. 어쩜, 너는 변한 게 없네. 그대로야, 똑같아.” 

“너도 마찬가지야.”


둘은 서로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자신이 열렬하게 사랑했던 그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지 찾으려는 듯이. 키가 커졌고, 젖살이 빠진 얼굴은 턱선이 도드라져 보였다. 마주 보는 얼굴에서 시간의 힘을 새삼스레 느끼고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눈앞의 모습이 진짜인지 마지막 기억 속에 아이 모습이 진짜인지 순간, 경계가 모호해져 감을 감추고 싶었다. 



줄리엣의 집.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발코니도 있다.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북적. 사랑을 이루고 싶은 사람들이 가득찬 이 곳.



어린 티를 채 벗어내지 못했지만, 그 또한 십 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던가. 서툴렀기에 순수할 수 있었고, 세상에서 둘보다 소중한 존재는 없었으니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에 처음 눈을 뜬 날카로운 본능의 순간에, 오롯이 둘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둘은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헤어짐을 택했다. 한때의 열병일 뿐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하지만 본인이 들었을 땐 “남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라는 공격수로 일단 한번 걷어차 버리는, 그 흔하디흔한 말로 부모는 아이를 달래었다. 순응보다는 반항과 친했던 십 대의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는 자신이 속해있는 ‘가문’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이별이라는 아픔에 옭아매 버렸다. 자신의 전부를 떼어놓아야만 한다는, 어쩌면 다시 살아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끝없는 두려움을 이겨내기를, 무자비한 아픔을 이겨낼 것을 강요했다. 


무리한 요구였던 걸까, 로미오와 줄리엣은 베로나를 도망치듯이 떠났다.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더는 함께할 수 없음에 비극이 되어버린 도시는 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버틸 수 없었다. 로미오는 피렌체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말하던 미술품 복원사가 되고 싶었던 그였다. 줄리엣은 독일로 유학을 떠나 경제학을 전공했다. 




일상의 힘은 참으로 대단해서 상처가 깊게 팬 자리에 조용히 녹아들었다. 처음 몇 번은 금세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다. 낫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일상 덕분에 더 이상의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가려진 건지, 완전히 아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둘은 출장이라는 명목으로 베로나에서 다시 마주쳤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이유였으며, 떠났음에도 한동안 아파해야만 했던 유일한 존재를. 우연이라는 녀석은 심보가 참으로 고약해서 때로는 반가움을 데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슬픔을 데려오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것을 데려오기도 했다.





둘은 자신들이 자랐던 거리를 걸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거리였다. 독 그 자체였던 베로나는 더는 독을 품고 있지 않았다. 숨만 쉬어도 온몸을 마비 시킬 것 같았던 독은 시간의 힘에 조금씩 흩어지고 사라지고 지워지고, 이제는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미 온갖 감정이 밀물처럼 밀고 들어왔다. 말끔히 사라져 버린 독에 대한 연민도 포함되었다. 변한 건 두 사람뿐이었다. 십 대가 삼십 대가 되었을, 딱 그뿐이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각자가 속한 안정적인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어쩌면 마주치지 않는 게 더 나았을까’하는 후회와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는 안도감이 뒤섞여 무섭게 몸을 휘감았다. 정답이 없는 어려운 문제였다. 삼십 대인 두 사람이 풀어내기에는. 


또다시 십오 년이 흘렀을 때, 마흔의 중턱에 머물렀을 땐 풀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십오 년씩 몇 번을 반복한 뒤 생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풀어낼 수 있는 문제일까. 베로나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품은 채, 두 아이를 뱉어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품은 이 아름다운 도시가 비극적인 사랑의 종착지가 되기엔 아쉬움이 컸다. 적어도 내가 본 베로나는 그랬다. 두 사람의 끝은 최소한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인사’가 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살아있다면, 그래도 서로의 기억 속에서만큼은 존재할 테니까.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베로나. 이 세 단어가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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