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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Apr 09. 2019

아픈 건 그녀의 발뿐이기를 바랐어

빨강머리 앤이 당신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지금 사당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한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봄비였어. 종일 내리던 비는 퇴근 시간에도 그칠 줄 몰랐지. 덕분에 지하철 대기줄은 각양각색 우산들의 모임 같았지. 파란 우산, 초록 우산, 검은 우산, 분홍 우산. 다리 길이만큼 긴 장우산, 3단 우산, 2단 우산. 빗물이 어설프게 털려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우산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우산이 있었어.


아마 네가 봤어도 그랬을걸? 쨍한 핫핑크 우산이었거든. 그런데 우산 주인은 화려한 우산에 비해 굉장히 단정한 느낌이었어. 깔끔한 검은색 정장에 검은 구두를 신고, 부드러운 재질의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고, 이마가 드러나도록 단정하게 빗어서 묶은 머리. 귀에 착 달라붙은 적당한 크기의 귀걸이까지. 승무원 같은 느낌이었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지. 아, 회사 면접을 보고 오는 길이구나.

지하철 안으로 한 걸음씩 떼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잘 봤을까’가 궁금하기보단, ‘고생했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어.


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면접이라는 자리는 언제나 부담스럽잖아? 축배는 경쟁을 뚫고 승리한 소수에게만 허락되었고, 그렇지 못한 대다수는 고배를 마셔야만 했으니까. 쓰디쓴 결과를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건, 내 몸집보다 훨씬 큰 돌덩어리를 마음 깊은 곳에 가져다 두는 것 같았어. 돌덩어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고통을 받는, 그런 느낌이었지.


혹 그녀도 그렇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 옆에 자리를 잡았어. “출입문 닫습니다.” 기관사 아저씨의 고단한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흘러나오자,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어. 어렴풋하게 ‘엄마’라는 말이 들렸어. 엄마랑 통화하고 있었구나. 전화기 너머의 엄마는 딸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있을까. 우리 딸, 고생 많았다고. 최선을 다했으니 되었다고, 그렇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었을까.


엄마의 딸은 엄마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속삭이듯 몇 마디를 더 하곤 휴대폰을 얼굴에서 떼더라고. 눈시울이 약간 붉어진 것 같았어. 온전한 내 편의 괜찮다는 그 한마디에 감정이 순간 울컥 했겠지. 엄마의 목소리가 그녀를 포근하게 보듬어주었기를 바랐어. 내가 해줄 수는 없었으니까.


그녀와는 몇 개 역을 동행했어. 그동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지. 내 모습 같았거든. 검은 구두 속에 갇힌 발이 아픈지, 자꾸만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라고. 저 갑갑한 신발을 얼마나 벗어던지고 싶을까? 허벅지를 압박해오는 스타킹에서 얼마나 해방되고 싶을까? 발이 너무 아플 때는, 정말 신발 따위는 벗어버리고 맨발로 있고 싶다니까. 혹 그녀가 그렇게 아파하고 있지는 않을지 신경이 쓰였어.


아픈 건 그녀의 발뿐이기를, 그녀의 마음은 제발 다치지 않았길 기도했지.


모르는 사람 때문에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없기를 말이야. 그런데 그거 알아? 욕이나 심한 말을 들었을 때만 상처를 받는 게 아니야.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들었을 때도 ‘어이없음’으로 상처를 받을 수 있거든.




몇 년 전 한참 면접 준비를 하던 때였어. 인상 깊은 1분 자기소개를 하겠다고 만족스러울 때까지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어. 그걸 참 열심히도 외웠지. 무슨 질문이 나올지 모르는데 적어도 자기소개만큼은 완벽하게 하고 싶잖아?


막상 면접에 들어가니 “자기소개는 넘어가도록 하죠.”라고 하는 회사도 있었어. 허무했지만 그러려니 했지. 하지만 어떤 회사는 면접을 본 다섯 명의 지원자 모두가 완벽하게 자기소개를 했음에도 “다들 암기를 잘하시네요. 진심이 안 느껴져서 아쉽습니다.”라고 조롱하듯 얘기하는 거야. 지원자들의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아마 내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거야?’라고.


더듬더듬 말해야 했나?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잊히지 않아. 폭언은 아니었지만 다른 방법으로 내게 상처를 준 거지. 나중에 내정자가 있었더라는 소문이 돌았어. 듣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소문이었지.


그녀는 이런 어이없는 일을 겪지 않았길 바랐어. 한 명의 사람으로서 미래의 잠재고객이라는 걸, 면접관들이 부디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이랄까.


그녀가 내리고 난 뒤, 딛고 서 있던 바닥을 봤어. 고단했을 그녀의 하루가 검게 변해 고스란히 묻어 있었어. 우산에 긁히고 누군가의 발걸음에 치인 그녀의 흔적을 나는 기억하고 싶었어. 엄마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도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고된 하루를 보냈을 당신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다고 말이야.


“당신, 오늘 하루 고생 많았어요. 정말 고생 많았어요.”


지금쯤이면 그녀와 그녀의 핫핑크 우산은 집에 잘 도착했겠지? 그녀의 발을 아프게 했던 답답한 구두와 스타킹 따위는 벗어던지고, 따뜻한 엄마의 품에서 편안히 쉬었으면, 봄비가 훑고 간 오늘이 지나고 내일의 상쾌한 공기가 그녀를 따뜻하게 감싸주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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