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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Apr 16. 2019

너의 안녕할 연애를 위하여

빨강머리 앤이 당신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지선이의 이별 소식이 들려온 건 단체 메신저를 나누던 채팅방에서였어. 이십 대가 삼십 대가 되는 동안 겪었던 수많은 이별과 만남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때로는 함께 울어주고, 때로는 함께 축하해주었던 우리만의 공간이었지. 


첫 회사에서 시작한 그녀의 연애는 그곳을 관두고도 두 번의 회사를 옮길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결국 세 번째 회사에 들어감과 동시에 헤어졌다고 하더라고. 얼마 전부터 남자 친구 이야기 대신, 매일 야근의 연속이라는 말을 더 많이 하기 시작했다고 조심스레 짐작할 뿐이었지. 무덤덤하게 이별을 이야기하던 지선이는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덧붙였어. “20대의 연애와 30대의 연애는 여러모로 정말 다른 것 같아.”라고. 


아무도 “뭐가?”라고 되묻지 않은 거로 봐선 다들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눈치였어. 나도 마찬가지고. 그녀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언급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각자 지난 연애 속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조용히 공감했던 거지. 


네가 만약 서른의 문턱까지 가기 위한 여정이 많이 남았다면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지 궁금할 테고, 만약 서른의 문턱에 가까웠거나 이미 지났다면 짧게라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까? 무엇이 고개를 끄덕이게 했을까, 궁금했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으니까. 


20대의 연애는 ‘처음’이라는 이유로 서투름 투성이었는데, 30대에 접어들면서는 더욱 능숙해진 내 모습에 종종 놀라곤 했지. 만남에 대해 조금 더 여유로워지고, 조금 덜 조급해할 수 있게 되었어. 이별은 할 때마다 여전히 아팠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을 어떻게 보듬어줘야 하는지 요령이 생겼다고 할까? 조금 더 상대방을 기다릴 줄 알게 되었고,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 한 번 더 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했고 한 번 더 참고 말하는 방법을 깨달았어. 


마치 20대의 연애는 서툴기에 풋풋하고 순수한 5월의 느낌이고, 30대의 연애는 한층 여유로움을 품고 있는 10월의 느낌이랄까. 영화에서 첫사랑의 기억은 5월의 푸름과 싱그러움 속에서 피어나곤 하잖아? 연보랏빛 꽃이 주렁주렁 매달린 등나무 아래에서 고등학생은 설렘을 만끽하기도 하고, 때로는 담장을 타고 넘어오는 라일락의 짙은 향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되기도 하지.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밝은 햇살 아래에서 누군가의 마음은 이미 떨리기 시작했을 테니까. 


하지만 5월의 달콤한 향기는 너무 빨리 사라져 버리고, 매서운 장맛비가 들이닥치는 날, 두 주인공은 이별을 하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는데도 서툴렀던 고등학생, 또는 20대 초반의 뜨거웠던 연애는 사소한 일로 종지부를 찍는 거야. 


작은 일로 오해하고,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고받은 채로 말이야. 역시 사랑은 쉬운 게 아니야,라고 지레 겁을 먹으면서. 이상하다, 분명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날들이었는데. 내리꽂는 굵은 장맛비에 행복했던 기억마저 씻겨 사라질 것 같은 불안함이 몰려왔지. 


화가 난다고 거침없이 쏟아내었던 감정의 파편들이 문득 떠올랐다 사라지곤 해. 소낙비처럼 매섭게 쏟아내었었는데. 피할 겨를도 없이 말이야. 아주 약한 비닐우산 하나를 손에 쥔 채로 화살 같은 빗줄기를 이겨내야만 했던 그때의 그에게 가끔 미안했어. 얇은 비닐우산은 있으나 마나 한 우산이었을 텐데, 참 용케도 묵묵히 맞고 있었구나, 옷이 흠뻑 젖는 줄도 모르는 채로 말이야. 


우리 둘 다 서툴렀던 거야. 이별인 줄도 모르고 이별을 했지. 만남과 헤어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었을까, 지겨운 장맛비가 지나가고 뜨거운 한여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기 시작하는 거야. 이해와 배려라는 감정을 말이야.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즈음에서야 조금은 성숙해진 내 모습을 볼 수 있었어. 어설펐던 스물 초반의 연애는 스물 중반을 거쳐, 후반으로 가고, 서른이 넘어가듯, 조금 더 어른스러운 연애를 하고 있더라. 


하지만 때론 걱정이 되기도 해. 혹 사랑이라는 감정에 나 자신이 무뎌진 건 아닌지, 정말 미칠 듯이 뜨겁게 사랑했던 스무 살의 열정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하고.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모두 갖고 오게 마련이니까. 


7월, 8월의 한여름을 거쳐 오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저하되었으면 어쩌나, 연애 세포가 퇴화돼버렸으면 어떻게 하나. 사랑이라는 감정만을 향해 돌진했던 5월과 달리, 10월의 풍요로움 속에서 사랑 이외의 중요한 게 눈에 들어오며 혼란스럽기도 했지. 


나는 연애보다 일이 더욱 중요한 걸까, 그렇다면 누군가를 만나는 건 그에게도 미안한 일이 되는 걸까. 우린 정말 사랑하긴 하는 걸까, 오랜 시간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의미 없는 만남을 지속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인공호흡기에 호흡을 의존하듯이 ‘함께 한 시간’이라는 연애 연장 기계에 우리의 사랑을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마 지선이가 말한 ‘여러모로’ 속에는 저런 고민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30대에는 20대의 연애보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일과 사랑의 균형, 그리고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서도 말이야. 이 편지를 읽으며 생각이 많아지는 친구들도 있을까? 바라건대 부디 지레 겁먹고 회피하진 않았으면 해. 너의 안녕할 연애를 위해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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