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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Apr 23. 2019

슬럼프, 난 널 원하지 않았어

빨강머리 앤이 당신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 


뭐가 문제일까, 원인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말았어. 매일 반복되는 무료한 일상과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의 좌절감으로 앞으로 나아갈 힘을 모두 소진해버린 상태, 사람들은 그걸 ‘슬럼프’라고 불렀지.


슬럼프는 성격이 제법 고약한 말썽꾸러기 녀석이었지. 오면 온다고 말이나 하고 오지, 예고 없이 조용히 찾아와서는 내 삶을 쥐고서 뒤흔들려고 하니까. 내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후에는 이미 한발 늦은 상태였어. 이전으로 되돌리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거든. 


“꼭 가고 싶은 회사예요. 합격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면접을 보고 온 날이면 어김없이 기도하곤 했어. 종교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날만큼은 기도해야 할 것 같았거든. 절실했으니까. 오랫동안 준비해온 회사라고, 입사만 한다면 인생의 제2막을 화려하게 데뷔할 수 있으니 제발 기회를 달라고 말이야. 


절실함이 닿은 걸까, 원하던 곳에 입사했고 행복한 날들이 펼쳐지는 듯 보였지. 대학생이 만지던 돈과 다른 단위의 돈이 내 손에 들어왔고, 많은 걸 할 수 있었어. 사고 싶었던 카메라를 사고, 피아노를 사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어. 처음엔 뿌듯하고 행복했지. 열심히 일해서 능력을 인정받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겠노라 다짐도 했어. 


화려하게 데뷔한 무대에서 행복한 날들이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실은 정반대였어. 선배들이 내내 말하던 ‘3, 6, 9의 저주’를 피해 갈 수 없었거든. 아마 대부분 한 번씩은 들어봤겠지? ‘3개월, 6개월, 9개월마다 회의감과 함께 퇴사 욕구가 치솟는다. 1차 고비를 넘기고 나면 다음은 3년, 6년, 9년 차에 고비가 찾아온다.’ 슬럼프였어. 

승진 앞에서 부딪힌 유리 장벽의 한계는 나를 다시 한번 쓰러뜨리기까지 했지.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했지만 정말로 그랬을 리가. 전진이 아니라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은 나를 더 지독하게 괴롭혔지.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 헤매었어. ‘슬럼프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초심을 되찾는 것이다’라는 말을 주문 삼아 끊임없이 되뇌고 다녔지만 별 효과는 없었어. 내가 얼마나 들어오고 싶어 했던 회사였는지, 합격 통보를 받았던 그 날의 벅차오름과 온몸으로 느끼던 짜릿함을 기억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뚜렷이 기억나지 않았을뿐더러, 감동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까. 초심을 잃어버린 내 모습에 실망할 뿐. 


슬럼프에 대응했던 방법은 두 가지였지. 버티거나, 뛰쳐나오거나. 전혀 다른 두 행동은 전혀 다른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어. 어느 쪽을 선택하든 후회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는 거야.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호기롭게 뛰쳐나왔지만, 막상 현실 앞에 좌절감을 느낄 때. 반대로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헤쳐나갔지만 결국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둘 다 내 일이 되다 보니 무엇이 나은지, 어떤 게 현명한지 판단이 서지 않더라.  


그때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때 했던 선택이 지금의 나와 주변 사람의 차이를 만들기도 했으니까. ‘남과 비교하지 말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만을 두고 비교하자.’ 모두 공감했고 직접 실천해보려고 했지만,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란 걸, 너는 이해해주리라 믿어.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해진 건 이거야. 뛰쳐나가도 봤고, 버텨보기도 한 나의 경험들은 내 마음의 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들을 수 있도록 해줬다는 것. 

어떤 선택이 덜 아플지, 덜 후회할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었으니까. 남의 말을 듣고 남의 선택에 의지해 내 선택을 미뤄왔던 거야. 바보 같았어. 나를 탓하기보다 남을 탓하는 게 마음이 덜 불편하다는 핑계로 해왔던 실수였지. 누구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고, 나의 선택에 어떠한 책임을 져주지도 않는다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남이 아니라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 덜 후회할 선택을 해나갈 거라 믿음. 어쩌면 슬럼프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할 방법은 뛰쳐나오는 것도, 버티면서 이겨내는 것도 아닌, 자신을 향한 믿음이 아닐까 싶어. 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내린 결론에 대한 믿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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