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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Apr 30. 2019

나이가 들어간다는건 예전엔 몰랐던 걸 알게 된다는 거야

빨강머리 앤이 당신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 


한 해를 가리키는 숫자가 바뀌고, 한 살씩 늘어 앞자리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문득문득 우울함을 느끼게 했고 묘한 기분마저 들게 했지. 더는 나이를 먹지 않았으면 좋겠어, 여기에서라도 멈추었으면 좋겠어, 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가득했던 어느 해, 나는 예상치 못한 경험을 했어. 


우연히 책꽂이에 꽂혀있던 ‘한국 단편소설집’을 발견했던 날, 분명 내 방이었지만 낯설게 느껴졌던 그 순간, 한참 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지.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데 고등학생 앤 셜리와 성인 앤 셜리가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았거든. 


고등학생 앤 셜리가 말을 걸었어. ‘지루한 책을 골랐네요.’ 

어른 앤 셜리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지. ‘교과서에 실린 소설이 어떻게 재미있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어린 앤에게 꼭 그런 건 아니야,라고 말을 하려다가 이내 말을 접어 넣고 말았지. 그녀가 보낸 국어 시간이 떠올랐거든. 


수업 시작과 동시에 선생님은 초록색 칠판에 하얀 분필을 잡고 열심히 써 내려가셨어. 시대적 배경이 언제라느니, 주제와 제재가 무엇이라느니,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느니.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를 담은 글은 독자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다를 텐데, 하나의 정답을 주입하려 했으니 재미가 없을 수밖에는. 책 속의 주인공과 열일곱 살의 앤 사이에서 존재하는 세대 차이는 공감대를 형성하기엔 무리가 있었지. 


하지만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어. 지루해하던 책을 쉼 없이 읽어나가고 있었거든. 이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책이었던가? 의아했어. 바뀐 건 딱 두 가지뿐이었으니까. 보고 있는 책이 ‘국어 교과서’가 아니라 ‘단편소설집’이라는 것, 내가 십 대가 아니라 삼십 대가 되었다는 것. 글은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는데. 


신기했어. 고등학생 앤이 보았던 소설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주인공의 감정 변화가, 의미 파악이 어려웠던 반어법 문장을 정확하게 이해했으니까. 오히려 ‘이걸 몰랐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지. 

시골 꼬마와 서울 꼬마의 풋풋한 감정을 품은 「소나기」, 운수가 좋았던 날 결국 가장 큰 슬픔을 맞이해야만 했던 김 첨지의 얄궂은 운명 이야기 「운수 좋은 날」 속에 푸욱 빠져서 교감을 나누었던 거야.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내 이야기가 섞여 있었으니까. 


신호등의 신호가 유난히 잘 맞아떨어져 늦게 일어났지만 지각하지 않았던 그날, 회사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마저 대기 없이 탈 수 있었던 그날, 퇴근길 버스에서 운 좋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그날. 나조차도 ‘어? 오늘 왜 이렇게 타이밍이 잘 맞지?’ 생각했었던 그 날. 물론 기분은 좋았지만 동시에 약간의 불안함이 엄습해 오곤 했었지. 김 첨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 바로 그거였어. 나이를 먹어가면서 좋은 경험, 나쁜 경험이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쌓여가며 주인공의 감정에 스며들 수 있었던 거야. 나의 경험이 풍부할수록 공감대 형성이 쉬웠지.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더라도, 가슴 아파할 줄 알게 되었고 환희를 느낄 수 있었어. 주인공의 억울함에 화를 내기도 했고, 적나라한 비판에 속이 시원해지기도 했어. 내 손에 있는 건 누군가의 글이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누군가의 삶의 흔적이, 삶의 희열이,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어.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걸 이해하게 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글에서 묻어 나오는 감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삶이 다양한 생각과 감정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꽃 피워나갈 수 있다는 것.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간다는 건, 세상을 좀 더 깊고 세밀하게 바라볼 수 있는 현미경을 얻는 일이구나.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선생님처럼 옆에서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삼십 대의 앤 셜리가 깨닫기에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지. 어쩌면 삼십 대가 되어야만 보였을 삶의 가치였을지도. 아마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도 넓어지겠지? 조금 더 성능이 좋은 현미경으로 업그레이드는 한다고나 할까? 앤 셜리의 현미경은 얼마나 좋은 현미경이 되어있을까, 궁금하고 떨려! 분명 멋진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을 거야, 나도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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