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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May 14. 2019

친구니까 익숙한? 아니 친구라서 무례한

빨강머리 앤이 당신에게 보낸 여섯 번째 편지 


한 방송에서 어떤 작가가 그러더라. 이탈리아에는 겨울의 지중해를 함께 보낸 사람이어야 친구로 인정한다는 말이 있다고. 따뜻한 계절에 와서 온화한 지중해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떠나가는 여행자가 아니라, 겨울 지중해의 추위, 축축함 그리고 쓸쓸함 같은 지중해의 민낯을 함께 겪어야만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거야. 


비록 진짜 지중해의 겨울을 함께 보내진 못했지만, 그에 버금가는 민낯을 공유하며 함께 한 친구 두 명이 있었어. 아픈 가정사를 힘겹게 꺼내놓을 땐 자기 일처럼 위로를 해주었고, 원하는 회사에 취업했을 땐 함께 축하해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조용히 안아주면서 같이 울어주었던 친구들이었어. 함께 한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우리의 관계를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버팀목이 되었지. 


그렇게 십 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해왔다는 건 분명히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 시간이 만들어준 편안함이 서로를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지 못한 채로 지냈던 것 같아. 굳이 고민해볼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핑계인 걸까? 


작년 여름, 우리는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어. 모두 바쁜 일정 속에서 어렵게 맞춘 날짜였지.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3박 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휴가계가 반려될까 봐 어찌나 조마조마했는지. 휴가가 확정될 때까지 단체 메신저로 생중계를 해댔다니까.


“내 휴가는 결재 났어!”

“나도 나도!”

“아, 제발 내 휴가계도! 부디 제발!”


다행히 우리 세 명은 함께 휴가를 떠날 수 있게 되었어. 얼마나 설렜겠니? 친구들끼리만 떠나는 여행이라고, 그것도 3박 4일 동안 홍콩으로 떠나는 첫 해외여행!


항공권을 사고, 호텔을 예약하고, 하나씩 준비를 해나갔지.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무얼 먹을지. 각자 조사할 내용을 분담했어. 어느 한 명한테 일이 몰리지 않도록 모두 신경을 썼어. 고맙더라. 여럿이서 여행을 갈 때 꼭 누구 한 명이 주도해서 해야 일이 진전되더라고, 그래서 그 한 명은 너무 피곤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 우리는 서로 잘 알아서 하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지 몰라. 그때마다 “앤, 우린 친구잖아.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는 말을 하며 서로 웃곤 했지.


“Ladies and Gentlemen”

홍콩에 도착했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어. 드디어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온몸을 휘감아 치는 습습한 공기마저 기분 좋았지. 여행자로서 자유를 만끽하러 왔으니까! 딤섬이 유명한 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뷰포인트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말이야. “남는 건 사진뿐이야!”를 외쳐대며 서로의 휴대폰과 카메라에 우리 셋의 모습을 끊임없이 담았지. 까르르, 우리가 머물렀던 장소가 웃음소리로 채워졌어. 3박 4일 내내 첫날처럼 행복한 일들만 가득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제는 홍콩에 도착한 셋째 날이었어. 알고 보니 친구 두 명의 여행 취향이 확고하게 달랐던 거야. 이걸 왜 미리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뜨거운 햇볕 아래서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고, 축축하고 무거운 공기는 숨을 턱턱 막히게 했지. 그 속에서 이틀을 내리 여행하다 보니 마지막 날은 셋 다 지친 거야. 다들 조금씩은 예민해져 있었던 거고.


“우리 오늘은 디즈니랜드에 가보자! 일정이 안 맞아서 못 갔었잖아. 엄청 아쉬웠다고~”

“미안한데 나는 좀 쉬고 싶어. 우리 휴가를 왔는데 정작 쉬지는 못했잖아. 어제도 많이 구경했으니, 오늘은 좀 쉬는 게 어때? 디즈니랜드는 다음에 와서 가보자.”


미리 조율할 수 없었어. 아무도 의견 차이가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오랜 시간을 함께해왔으니 서로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너의 생각과 내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던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해왔지만, 그 시간이 모든 걸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는 걸, 우리는 몰랐던 거야. 무려 십 년이라고, 눈빛만 봐도 서로 원하는 걸 알 수 있다는 편안함과 익숙함이란 탈을 쓰고, 배려와 존중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한 거야.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홍콩에서의 마지막 밤을 허무하게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각자 생각할 시간을 가졌어. 우리가 잃어버린 게 뭔지, 잊고 있었던 건 뭔지 생각해보자고 했지. 편안함이 때론 무례함이 되지 않았나, 익숙함이 때론 이기심이 되어 서로를 아프게 베지는 않았나.

선선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던 그해 가을, 우리는 서로에게 진심으로 사과했어. “미안해.” 이 한마디에 울컥, 하고 말았어. 참 따뜻한 말이지. 차가워진 마음을 온기로 감싸 안아주는 멋진 말.


무더웠던 여름, 우리에게 찾아온 열병은 한 번 큰 소란을 피우고 지나갔어. 열병이 남긴 상흔은 서로를 연결해주는 상징이었어. 

 

친구라는 이름으로 무례함도 이기심도 이해받으려 하지 말라는 걸 가르쳐줬으니까


우린 그해의 지중해 겨울을 함께 보낼 수 있었어. 코끝을 빨갛게 만드는 시린 겨울바람마저 우리 관계를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거라는 믿음과 함께. 


너에게도 지중해의 겨울을 함께 할 누군가가 있겠지? 고맙다고, 마음을 다해 한번 안아줘. 매서운 바람 속에서 서로의 온기로 따뜻해질 수 있도록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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