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재 May 21. 2019

다친 너의 마음이 찰나에 아물기를

빨강머리 앤이 당신에게 보낸 일곱 번째 편지 


혹시, 핫초코 좋아해? 달콤하고 따뜻한 초콜릿 음료 말이야. 달달한 향을 맡기만 해도 차가워진 몸과 얼어버린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은 마법이 펼쳐지지. 내게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음료야. 핫초코를 마셔서 그녀가 생각이 나는 건지, 그녀가 생각날 때 마시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핫초코와 꼭 잘 맞았던 한 여자가 있었어.



딸랑, 종소리가 가볍게 울리더니 내 또래 여자 두 명이 걸어 들어왔어. 내 옆자리에 앉고 얼마 후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진 머그잔이 그녀들에게 전해졌지. 초콜릿 향기가 내 코까지 스멀스멀 스며들었어. 짙게 묻은 달콤한 향. 그녀들의 이야기도 달달했으면 좋았을 텐데.


머그잔에 입술이 한번 닿고 나니, 이야기가 바로 시작되었지.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가, 커피잔을 만지작거렸다가 다시 허공으로 손을 던졌다가 하면서. 그녀의 제스처만으로도 꽤 흥분한 상태라는 걸 누구라도 짐작했겠지?


사실 듣고 싶진 않았지만 특유의 목소리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귀가 그쪽으로 움직이는 거야. 왜 그런 적 있지 않니? 손은 내 자리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지만, 귀는 옆 테이블에서 서성거리다가 결국 내 정신마저 끌고 가버리는. 난 그걸 ‘카페에서의 유체이탈’이라고 불러!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하는 꽤 신기한 경험이지.  


그런데 그 여자,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울먹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다시 화가 난 목소리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일까, 마음이 더 쓰이기 시작했어.


“와, 진짜 황당해.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분명히 우리 둘만 알기로 하고 얘기한 건데. 솔직히 상사 욕 좀 할 수 있는 거지, 얼마나 성인군자들이라고 불만 없는 척 고상한 척 다니는 거냐고. 이해할 수가 없네!”


“다 그런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열을 내고 그래.”


어어? 저렇게 말하는 건 적절한 대답이 아닌데. 나라면 저렇게 얘기하지 않을 텐데. 나는 말하기도 좋아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정말 좋아하거든. 그녀는 친구의 말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다시 말을 이어가더라고. 정말 다행이었지.


“아니 내 말 좀 잘 들어봐. 업무 지시에 우선순위를 결정해달라는 게 그렇게 바보 같은 질문이었어? 나를 얼마나 무시하던지. 그런 것도 일일이 정해줘야 하냐면서 말이야. 나 입사한 지 이제 한 달 된 신입사원이란 말이야! 본인은 입사 한 달 차에 얼마나 스스로 알아서 하셨는지 정말 궁금하다! 그날 점심시간에 입사 동기와 어쩌다 보니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어. 그게 화근이었지. 다음날 출근하니까 부장님이 나한테 그러는 거야. 


‘소혜 씨, 이제 업무의 우선순위를 하나하나씩 다 정해주겠습니다. 그게 불만이라는 걸 이해할 수는 없지만요.’  


이야기가 부장님 귀에 들어간 거야. 분명 둘이서만 했던 말인데. 대체 저 [불만]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생겨 난 걸까? 나는 입 밖에 내지 않은 말인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제가 더 열심히 하겠다고 해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어. 결국 나는 ‘네에.’라고 짧은 단어를 세상에서 제일 길게 대답하고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어.”


소혜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말을 하는 동안 핫초코를 몇 번이나 입속으로 넣었는지 몰라. 어쩌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정 컨트롤이었을지도. 홀짝홀짝 마시는 소리가 훌쩍훌쩍하는 소리가 될까 봐 난 힐끔힐끔 그녀를 바라보며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결국 난 동기와 일 이야기만 주고받게 되었어.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사내에서 아무하고도 이야기할 수 없게 된 거야. 수십 명의 동료 중에서 나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정말 슬프더라. 물론 회사는 일하러 가는 곳이지 친구를 사귀러 가는 곳은 아니란 걸 잘 알아.


나는 공과 사를 구별하지 않겠다는 게 아닌데. 그저 마음 맞는, 하루에 있었던 화가 나는 일에 함께 욕하고 재미있던 일에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길 바랐던 건데. 그건 나의 희망 사항이었을 뿐일까?”


그녀의 속상한 마음이 입안에 퍼지던 핫초코의 달콤한 향으로 가득 채워졌기를, 빠르게 쏟아낸 그녀의 이야기만큼 마음의 상처도 빠르게 아물었길 바라고 바랐어.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슬퍼 보였어.


난 상처가 가진 불공평함에 너무 화가 나. 봐봐, 종이에 손을 베이는 건 아차 하는 순간이잖아? 손가락을 훑고 간 자리에 붉은 피가 금세 채워진다고. 상처가 낫는 건 하루 이틀 동안 따끔거리는 통증을 견뎌내야 하는데 말이야. 정말 공평하지 않아. 

 

다치는 순간이 찰나에 벌어진다면아무는 동안의 고통도 찰나에 지나가 버렸으면 좋겠어


응어리가 모두 쏟아져 나왔을 때, 나는 정말이지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어. 처음 하는 사회생활에서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컸을까 싶어서 말이야. 많은 말을 하진 않을 거야. 한 마디를 하더라도 그녀의 속상함을 깊이 공감해 줄 거야. 말끔히 털어낼 순 없겠지만, 그녀를 할 퀸 상처가 조금이라도 빨리 나을 수 있도록 안아줄 거야.


가끔 핫초코를 마실 때면, 그녀의 떨리던 음성이 생각나. 지금쯤, 마음에 난 상처는 잘 아물었을지. 혹 또 다른 사람이 그녀를 할퀴고 지나가진 않았을는지.

난 그저, 그녀가, 상처를 받았던 그때의 그녀가 걱정돼.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핫초코의 달콤하고 따뜻한 향이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으면 좋겠어. 




이전 06화 친구니까 익숙한? 아니 친구라서 무례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