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재 May 28. 2019

때로는 시작하지 못하는 감정도 있어

빨강머리 앤이 당신에게 보낸 여덟 번째 편지


영주와 민주, 몇 달 만에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가벼운 포옹이 먼저 나오는 편한 친구였어. 근데 언젠가부터 영주와 민규 사이에 미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더라? 처음엔 그 낯선 기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어. 당연했지, 상상할 수 없었던 거니까.


“앤, 우리 진지하게 만나보기로 했어.”

“그럼 뭐, 우리가 언제는 진지하게 안 만난 적 있었어?”

“아니, 우리, 사귄다고.”

“뭐?!”


하마터면 먹고 있던 아이스 라떼를 민규 얼굴에 뿜을 뻔했다니까. 드라마에서처럼 말이야, 푸훕! 하면서 분무기처럼 촤-악. 깨끗하게 잘 다려 입은 민규의 하얀색 셔츠에 옅은 갈색 얼룩이 남을 뻔했지. 얘는, 그런 말은 입안이 비어있을 때를 맞춰서 해야지.


“우와 정말 축하해! 뭐야, 누가 먼저 사귀자고 한 건데? 축하는 하는데 좀 놀랍다 야.”


장난 섞인 나의 말에도 그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어. 내가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뭐, 솔직히 조금은 부럽기도 했고!


친구에서 연인이 된다는 게 사실 쉽지 않은 거잖아? 헤어진 뒤에 친구마저 잃을까 봐 시작조차 못 하겠다고 하고, 친구한테 어떻게 감정이 생길 수 있냐며 마음을 아예 열지 않기도 하고. 영주와 민규에게도 그런 고비가 있었을까. 오래 전의 나처럼 그랬을까.






내가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건 어느 모임에서였어. 눈에 띄는 사람은 아니었어. 키도 얼굴도 목소리도 스타일도. 낯을 가린다고, 하지만 친해지면 놀라실 거라고, 스물여섯이고 한국 대학교 근처에서 살고 있다고. 끝인사마저도 어색하게 마친 그 아이와 그렇게 가까워질 줄은, 그땐 몰랐어.


스무 명 정도가 모인 모임에서 스물여섯 동갑은 우리 둘밖에 없더라. 한참 어리거나, 한두 살 많거나. 같은 해에 같은 학년이었고, 같은 연도에 있었던 이슈를 공유했기에 그만큼 공감대 형성이 쉬웠던 거야. 다른 사람보다 서로에게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좀 더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지. 게다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건, 함께 무언가를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어.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싶은 무더운 여름밤이면 서로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거야.


“뭐해? 시간 있으면 밥이나 먹자!” 


거절이 없었던 서로의 언어 덕분에 같이 있는 시간이 조금씩 쌓여가기 시작했어. 신나게 떠들고, 웃고, 위로받고, 위로하고. 서서히 물들어가는 줄도 모른 채 쌓여가는 추억을 차곡차곡 기록하고 있었던 거야. 일기장에 그 아이의 이름 세 글자가 적히는 날이 많아졌고, 만나서 어디를 갔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빼곡하게 채워지기 시작했어. 일기의 끝엔 항상 똑같은 말이 적혀 있었지.  


‘시간이 제발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아니 아예 멈춰버렸으면. 이 행복한 시간이 흘러가는 게 너무 아깝고 아쉽다. 붙잡아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황스러웠어, 분명 내 일기장인데 웬 낯선 여자가 있는 거야. 그저 대화가 잘 통하는 편한 친구일 뿐이었잖아, 그런 친구를 좋아한다고?라고 물어봤지만 일기 속의 낯선 여자는 아니라고, 오해라고, 부정하지 않는 거야. 


그때 알았어나 그 친구를 좋아하고 있었구나하지만 말할 수 없었어두려웠거든. 


친구를 잃을까 봐, 좋아한다는 말이 너와 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까 봐. 내 곁에 사랑으로 있을 수 없다면 우정으로라도 있어 달라고,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고 얼마나 마음을 다잡았는지. 우리의 관계는 나 혼자만의 위태위태함 속에 지속되었어. 그 친구에게는 내가 함께하는 시간이, 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 중에 하루였을 테니까.



어느 여름날, 세상의 소리는 이미 잠들고 달빛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갑자기 소리치는 거야.


“앤! 이제부터 흰 선만 밟는 거야!”


고요한 세상에서 그 아이의 우렁찬 목소리만 또렷하게 울렸어. 우리 둘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처음 만났을 땐 그렇게 쭈뼛쭈뼛,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하더니. ‘아, 정말 친해지면 깜짝 놀랄 거라더니 정말 그렇네.’ 첫인상과는 너무 달라진 모습에 웃음이 나왔어. 그런 나를 보고 왜 웃냐고 궁금해하던 표정,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 눈썹은 한껏 치켜올리고,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입은 삐쭉- 내밀고 바라봤던 표정. 그마저도 우스워서 빵, 웃음이 터져 나왔잖아.


흰 선만 밟으라니 무슨 유치한 장난인가 싶었지만 하자는 대로 했어. 애써 밟아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밟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재밌잖아? 생각보다 떨어진 거리가 넓어서, 조금은 뛰다시피 하면서 횡단보도를 건너왔지. 먼저 도착한 그 친구는 이제 마지막 흰 선에서 발을 뗀 내게 그러는 거야.


“앤, 내일은 네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하나 해결될 거야! 기운 내! 친구!”


별거 아닌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 어떤 멋진 말보다 위로가 되었어. 지금도 답답한 일이 있으면 그날을 떠올려. 횡단보도의 흰 선만 밟으며 건너고 혼자 중얼거리지.  


‘내일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하나 해결될 거야 앤.’




우리 둘은 서로 응원해주고 위로해주며 뜨거웠던 여름을 보냈지만, 우린 딱 거기까지였어. 더도 덜도 아닌 딱 친구까지만. 누구도 명확하게 선을 긋진 않았지만, 누구 하나 용기 있게 다가가지도 못했던 거야.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믿으니까. 친구마저 잃어버릴까 봐 두려움에 고백하지 못했던 내 모습도,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해.


억지로 이어보려 할수록 어긋나더라는 걸, 참 여러 번의 시련을 통해서 깨달았어. 누구 말마따나 사랑은 타이밍이라는데 연인까지 갈 인연은 아니었나 봐. 사랑으로 곁에 머무를 수 없다면 우정으로라도 있어 달라고 스스로 말해놓고 막상 이렇게 되니까 너무 아프더라. 안 아프다면 거짓말, 그건 정말 새빨간 거짓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아이러니하게도 무너진 마음을 다잡게 해 준 건, 나 자신이었어. 앉아있을 기운도 없어 바닥에 쓰러지듯이 누워있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너와 나, 멋지게 성장해서 서로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할 테니 너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 네가 응원해줬듯이 나도 너를 응원할게.’


와, 진짜 옛날이야기를 했네. 그 후로 어떻게 되었냐고? 우리의 선택대로 친구로서 서로의 안부를 묻곤 하지. 후회하지 않느냐고? 아니, 전혀. 그때는 아팠지, 너무 아파서 그 친구를 다시 볼 자신이 없기도 했었어. 하지만 이젠 괜찮아.


“내게 가장 뜨거웠던 여름에 네가 함께 해주었어, 고마워.”라고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거거든. 한여름 밤의 꿈같은, 여름밤의 달달한 공기처럼, 기분 좋은 향기 같은, 그런 여름날을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고 고백할 수 있을 거거든.


그래서 나는 영주와 민규가 부럽고,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 둘의 미래가 어떻게 그려지든, 두 명 모두 행복한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어. 나의 친구 영주, 나의 친구 민규가 서로에게 좋은 기억으로 존재하기를. 





이전 07화 다친 너의 마음이 찰나에 아물기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