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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Jun 11. 2019

힘들다는 말 한마디를 꺼내기가
그렇게 어렵더라

빨강머리 앤이 당신에게 보낸 열 번째 편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려 해. 누구나 거리낌 없이 쓰는 말이 다소 불편한 나의 이야기를 말이야.


‘잘할 거야.’라는 말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니? 고민을 털어놓을 때면 “무슨 걱정이야, 지금까지도 잘해 왔는데! 앞으로도 잘할 거야!”라는 말을 자주 듣곤 했지. 응원의 말은 내게 용기의 씨앗을 건네주었지만, 모두 건강하게 싹을 틔우는 건 아니었어. 쑥쑥 자라나는 튼실한 씨앗일 때도 있었지만 얕게 덮여 있는 흙조차 뚫고 올라올 힘이 없는 나약한 씨앗일 때도 있었으니까.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끈기’ 있는 사람. 타인이 보는 앤 셜리의 모습이었어. 아닌데? 나는 생각보다 게으르고 오늘 할 일을 미루는 걸 좋아하는 사람인데. 사람들은 고맙게도 나의 좋은 면만을 봐주었던 거야. 약간의 죄책감 비슷한 감정도 들었어. 진솔하지 못한 모습만 보였던 건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 마치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았거든. 부끄러웠던 거야.


우습지? 애써 만든 평판이 불편하다고 힘들게 벗어나려 한다는 게. 그래서 하지 못했어. 차라리 깊이 신경 쓰지 말자. 불편함을 느끼는 잠깐의 순간을 모르는 척 넘어가면 나의 좋은 이미지는 그대로 유지될 테니까. 나쁜 말도 아닌데 문제 될 거 없잖아? 바보 같았어. 그 속에 숨어 있는 내 마음은 돌보려 하지 않았으니.



우연히 참석한 독서 모임에서 민영이를 알게 되었지. 활발한 성격에 재치 있는 입담으로 분위기 메이커로 통하더라고. 그녀의 오랜 친구가 말하길 학교 다닐 때 공부도 제법 잘하고, 쾌활한 성격 덕분인지 반장을 도맡아서 했다고 했어. 누구라도 밝은 에너지가 가득한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을 거야. 나도 그랬고.


그녀는 가끔 상상 속의 세계로 나를 초대해주었고,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하면서 가까워질 수 있었어. 때로는 시답잖은 이야기로, 때로는 인생의 목표에 대한 이야기로, 그리고 아주 드물게 솔직한 고민을 하면서.


“앤, 나는 어릴 때부터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어. 힘들어도 힘들다고 할 수 없었고, 지쳤어도 쉬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어. 대신 괜찮아요, 잘할 수 있어요, 좋아요. 이 세 가지 말을 입버릇처럼 했지. 언제나 ‘뭐든지 잘하는’ 딸이자 친구이자 제자였거든. 사람들을 실망시킬 순 없다고 항상 생각했어.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건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서 내게 묶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 틀에 나를 끼워 맞춰 나가고 있었던 거야. 근데 있지, 이젠 힘이 드네.”


힘들다는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고민해왔을까. 그녀의 입에서 거짓 없는 말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처음이야, 다른 사람한테 힘들다고 말하는 건.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말이야.”


민영이를 닮은 햇살이 투명한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어. 내 마음속까지 닿은 햇살. 조곤조곤 건네는 이야기는 ‘김민영’의 고백이기도 했지만, ‘앤 셜리’의 고백이기도 했지. 나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에게 의젓한 모습만을 보이고 싶었거든. 그게 키워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어. 괜한 투정으로 두 분을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거야.


다행히 기대치에 동떨어지지 않게 성장을 했고, 흡족해하시는 모습을 보며 뿌듯했어. 언제나 나를 믿어주시는 무한한 사랑에 감사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슬픔이나 우울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스스로 철저하게 검열해야만 했어. 밝고 활기찬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었으니까. 앤 셜리의 고백이 김민영에게로 전해졌지. 마음이 마음으로 옮겨가서 어루만져주었고 그녀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공간을 채워나갔어.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넌 잘할 거야.’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압박이 되어 돌아왔어. 응원이 아니라 꼭 잘 해내야만 한다는 의무에 가깝게 느껴졌거든. 그래서 나는 저렇게 말하기가 조심스러워. 혹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봐, 남들이 말하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면서 살아오며 상처를 받았을까 봐.”


어쩜, 우린 놀랍도록 비슷했어. 각자의 어깨에 지여진 짐을 조용히, 묵묵하게 지고 걸어갔으니까. 힘들다는 그 한마디를 꺼내지 못한 채로 말이야.


“고마워, 민영아. 네 덕분에 나의 솔직한 마음을 드디어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어. 그동안 속으로만 힘들다고 이야기했을 뿐, 한 번도 누군가에게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네 용기 덕분에 외면하지 않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걸 배웠어.”


가끔은 너도 힘들다고 소리쳐 보는 건 어때? 아마 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너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깊숙이 감추는 것보다 훨씬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걸. 하지만 힘겹게 말하고 나면 알게 되겠지. 감추려고만 했을 때 느끼지 못했던 벅찬 감정을. 네가 소리칠 때 네 곁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 존재를 믿고 우리, 조금만 더 자신에게 솔직해져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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