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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재 May 07. 2019

오늘 면접에서 떨어졌어

빨강머리 앤이 당신에게 보낸 다섯 번째 편지


“훌륭한 역량을 가지셨지만 이번 기회에는 아쉽게도 귀하를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더욱더 좋은 곳에 취업하시길 기원합니다.”


아, 읽고 싶지 않은 문장이 적혀 있는 페이지를 읽어내야만 하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어. 아마 저 말만으로도 온몸에 기운이 쫙 빠져나가는 게 느껴질 만큼, 기분이 나빠지는 친구도 있겠지? 무슨 에너지 흡입 전용 청소기도 아닌데 말이야.


나도 그래. 어떨 때는 약을 올리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니까? 나보다 더 나은 누군가가 있으니까 안 뽑은 거겠지, 뭘 저렇게 빙빙 돌려서 말한담? 차라리 내가 부족해서 안 뽑힌 거라고 해줘요! 그게 더 속 시원하겠어요!라고 혼자서 소리칠 때도 있었지. 물론 그들에겐 들리지 않는 외침이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짓눌리는 거였어.  


공무원 시험을 몇 년 동안 열심히 준비하던 친구가 있었어.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고 난 후로는 다시 책을 펼 엄두를 못 내더라고. 결국 공무원 시험은 포기하고 말았지. 또다시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싶은 절망감이 순식간에 몸을 잠식시켰다고 했어.

 

올라갈 때는 한 계단씩 천천히 올라갔는데 단 한순간에 쭉 미끄러져 내린다는 게, 

죽도록 앞만 보고 달렸는데 눈을 떠보니 다시 원위치에 있다는 게 얼마나 기운 빠지는 일인지, 겪어본 친구라면 어떤 느낌인지 잘 알고 있을 거야.


불합격 통보를 받을 때마다 무서웠던 건 취업이 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가 아니라 내가 쓴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모두 날아가 버렸으면 어떡하지? 였어.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결과만 놓고 본다면 내가 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


결과물을 손에 쥐지 못했다는 건 자신감을 급격하게 하락시켰어. 내가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거든. 나는 몇 달 동안 뭐를 한 걸까?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채 한 줌도 남지 않은 자존감까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어. 분명히 열심히 준비를 했는데 왜 줄곧 실패를 겪어야 하는 건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누구라도 설명해달라고 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


탈락 통보를 마주하고 한동안은 무기력에 갇힌 채 보냈어. 훌훌 털고 다시 도전해야 한다는 걸 머리는 알고 있었지만, 가슴은 그렇지 못했거든. 일어날 수 있는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짧게는 며칠, 길게는 한두 달을 다친 마음을 돌보겠다고 일탈을 감행하기도 했지.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조금 더 괜찮은 방법이 있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어.  


면접에서 떨어져 속상해하는 친구에게, 어떻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지 막막하다는 그녀에게, 마음을 다해 한마디를 건네면서 알아차린 거야. “너는 헛수고를 한 게 아니야.” 그녀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했던 말이었어. 그날 밤, 그녀와는 밝은 표정으로 인사할 수 있었지. 우리 둘 다 활짝 웃고 있었을 거야.


나도 만약 주변 사람에게 “위로가 필요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면 누군가는 저렇게 진심 어린 위로를 해주었을 텐데. 괜히 혼자서 짊어지고 있었어.


그러니까 친구야, 너는 부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나는 위로가 필요하다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으면 해. 응?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좀 꺼려진다고? 맞아,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굳이 부정적인 에너지를 전파하고 싶지 않다는 거잖아?


하지만 매일 그러진 않는걸. 우리에겐 슬픈 일만 일어나는 게 아니니까.


네가 힘들 땐 누군가가 내어주는 어깨에 잠시 기대면 되고, 그가 힘들 땐 네가 어깨를 빌려주면 되는 거야. 행복한 기억을 공유한 관계도 좋지만, 아팠던 기억을 공유한 관계는 더욱 돈독해질 수 있다고.


만약 네가 면접에 떨어져 상실감에 빠져있다면, 이 편지를 읽었다면, 마음껏 슬퍼했으면 해. 다만 네가 쓴 시간과 비용, 너의 노력이 헛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기를 바라. 그렇지 않다고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거든. 네가 보낸 모든 시간은 결코 헛되이 사라져 버린 게 아니야. 너라는 사람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근육을 늘려주고, 힘을 길러준 시간이었음을 곧 깨닫게 될 거야.


그러니까 부디, 새롭게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를 모두 잃어버렸다고 주저앉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늘의 충분한 슬픔이 곧 내일로 나아갈 힘이 될 테니까. 정말이야, 힘들 땐 내 어깨에 기대서 잠시 쉬어도 좋아. 난 너를 언제나 환영할 거야, 나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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