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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가 프리만 Dec 23. 2023

그 파리지앤느는  나흘을 씻지 않았다

[마흔에 파리가 좋아질 줄이야] 우리집은 엘베없는 4층 - 4편 

그렇게 천장에 물이 새는 집을 뒤로한 채 터덜터널 식당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술했다시피, 나는 다소 멘탈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파리에 왔다. 그날도 어질어질해지는 뇌를 부여잡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집 대문을 나서고, 마레지구를 걷다보니 기분이 다소 좋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 나와 걷는 운동을 해서였을까, 마레지구의 아름다운 거리 사이사이를 스쳐 지나가서였을까, 따스한 파리의 햇빛과 공기가 머릿속의 커튼을 걷게 해준 것일까, 아이가 토끼 걸음으로 깡충깡충 뛰어가는 걸 뒤에서 지켜봐서였을까.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조금씩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한 마디 건넸다. "좋은데?". 아내도 그렇다고 했다.


레스토랑의 요리는 맛있었다. 인생에서 이렇게 맛있는 점심을 먹은 적이 있을까 생각할만큼 맛있었다. 물 새는 집에서 막 나온 사람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식사에 몰두했다. 오징어로 만든 엉뜨헤(entree)와 메인 요리인 농어스테이크를 이리썰고 저리썰며 먹었다. 와인도 두 잔이나 들이켰다. 사진을 찍어보니 영락없이 행복한 모습이다. 하…이 마성의 도시. "물 떨어지는 천장 걱정 따위는 하지 말라고. 지금을 즐겨"라고 말하는 듯했다. 거지 같지만 멋있어.

세느강의 정기가 느껴지던 농어스테이크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천장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는 다행히 좀 줄어들어 있었다. 마침 시간 맞춰 온 우리의 구세주 장 샤를. 몇 번 본 적 없는 사이지만 왜 그리 든든했는지. 왜 이렇게 의지하고 싶었는지. 여하튼 최대한 억울한 표정으로 천장에서 물이 새는 참사의 현장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윗집으로 올라간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내다 내려와 상황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물이 샌 지점은 위층의 샤워실 위치예요. 위층 사람이 샤워를 했는데, 마침 그때 배관이 터진 거 같네요."

"아 그렇군요. 바로 조치가 가능한가요?"

"그런데 내일(금요일)이 프랑스에선 중요한 공휴일이에요."

"네? 그렇다면…" 

"배관공을 불러도 월요일쯤에 올 거예요."

"그러면 계속 이 상태로 주말까지 있어야 하나요?"

"윗집 사람 말로는 오늘까지만 씻겠대요."

"네?"

"주말까진 집에서 씻을 일이 없을 거래요."


아 그렇군요. 욕실 배관이 터져 천장에서 물이 새는데, 안 씻으면 되는 거였군요. 장 샤를과 약 5초 동안 눈빛교환을 한 거 같다. 눈으로 나는 "아니 이게 끝이야?"를 외치고 있었고, 장 샤를은 "응 끝이야"를 말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아내가 조심스럽게 한 마디 거들었다. 


"아니 다시 물이 안 샌다는 걸 어떻게 보장할 수 있어요..."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지만, 정확한 표현은 "그걸 어떻게 믿냐"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고, 장 샤를은 그런 코리안들의 얼굴을 번갈아 본 후 살짝 웃으며 위층 사람을 그럼 여기로 데려와서 직접 니들에게 말하게 하겠다 했다. 그렇게 장 샤를은 총총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내가 그 틈에 말했다.

와인리스트를 봐서 기분이 더 좋아졌나..

"녹음하자."

"아 그래, 그런데 프랑스어 녹음해 봐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나?"

"녹음한 휴대폰 스피커로 음성을 틀고, 다른 휴대폰으로 구글 번역기를 돌리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녹음기를 켜기 시작했다. 마침 장 샤를이 윗집에 사는 마드모와젤을 데려왔다. 30대 초반쯤 됐을까. 그가 불어로 말한 것을 장 샤를이 통역을 해줬다. 문제를 일으켜 정말 미안하고, 대신 월요일까지 결코 욕실을 쓰지 않을 테니, 이해해 달라고 했다. 주말에 계속 외출할 거라 화장실 쓸 일이 없을 거란다. 배관공은 최대한 빨리 부르겠다고 했다. 


못 미덥고 못 미덥고 못 미더웠지만, 우리는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장 샤를과 윗집 여자는 몇 마디를 더 나눴다. 무슨 말이냐 물어봤더니, 주말에 어디가냐 뭐 이런 얘기였단다. 야이 한가한 파리지앙들아.

 

그렇게 협상은 끝났다. 장 샤를까지 떠날 즈음엔 물이 방울방울 하나씩 뚝뚝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아내와 나는 녹취 파일을 틀어봤다. 구글님이 노력했지만 알아먹을 수 없는 외계어 번역만 나왔다. 아직 기술 발전의 길은 멀구나. 그건 그렇고 이 나라 사람들은 천장에서 물이 새어도 그냥 이렇게 사는 건가. 연휴에 일하는 배관공은 정녕 없는 것인가. "안 씻을게요" 한 마디면 되는 것인가. 

 

해질녘이 되자 물은 이제 아예 떨어지지 않게 됐다. 밤에 자기 전에도 살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월요일까지 아무런 일 없이 일상은 흘러갔다. 천장에 물이 샌 사건을 잊을 때쯤 장 샤를에게 연락이 왔다. 화요일쯤 위층에 배관공이 수리를 하고 갔다는 것. 그 마드모와젤은 정말로 그때까지 안 씻는 모양이다.

안 씻고 다녀도 낭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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