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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팔이 소녀와 양초 할머니

성냥팔이 소녀가 진정 꿈꾸었던 것은… [브런치X저작권위원회]

    지독히도 추운 날이었다. 단단히 여민 모피 코트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추위에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성냥 사세요. 할머니, 성냥 한 갑만..."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목소리가 코트 자락을 붙잡았다. 어린 소녀가 뼈가 툭 불거진 손으로 성냥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꽁꽁 얼어 울긋불긋한 맨발에 머리는 산발. 40년 전의 나와 마주한 것만 같아 솜털이 쭈뼛 섰다. 강산이 수없이 바뀌었는데도 가난의 얼굴은 똑같았다. 소녀는 내 얼굴을 보고 팔을 뚝 떨어뜨렸다. 


    "아, 할머니는..."


    그러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발길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축 처진 소녀의 어깨를 긴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휘감았다. 나는 그 가엾은 뒷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가 꾹 다물었다. 소녀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운 구두쇠 할머니. 그게 바로 나였다.  


    40년 전 겨울. 뻣뻣하게 얼어서 다들 내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날,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아버지는 명줄 한번 길다며 바닥에 침을 뱉고는 날 다시 거리로 내몰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황동 손잡이와 뚜껑이 달린 거대한 쇠 난로. 눈처럼 하얀 식탁보가 덮인 탁자 위에 찬란하게 빛나는 저녁 식사. 수천 개의 초가 초록 나뭇가지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크리스마스트리. 판화 가게에 있는 것과 같은 알록달록한 그림. 칼날에 베이는 것만 같은 추위에 정신을 잃으면서도 꿈꾸었던 것들. 그 모든 것을 손에 넣자고 다짐한 순간이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악착같이 아껴서 돈을 모았다. 지독한 구두쇠라고 남들이 수군거려도, 처녀가 겁도 없이 양초 가게를 차린다고 핀잔을 줘도 끄떡없었다. 나의 소망은 단 하나였다. 온 벽이 갈라져서 불어 대는 바람 한 점 가리지 못하는 집 말고, 내 한 몸 편히 누울 수 있는 따듯한 집을 마련하는 것. 그 꿈 하나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지난한 세월이 꿈처럼 아득했다. 대단한 부자는 못 되었지만 내 집도 마련했고, 작은 양초 가게를 운영하며 먹고살 일 걱정 없게 되었다.


    어느덧 집에 다다랐다. 부츠를 툭툭 털고 들어선 집 안은 바깥보다는 나았지만 역시나 냉골이었다. 코트도 벗지 않은 채 성냥을 피워 양초 하나하나에 불을 밝혔다. 쥐새끼처럼 틈을 파고드는 추위는 늘 야속한 존재였다. 양초 수백 개를 밝히고 나서야 집 안에 온기가 도는 듯했다. 난 모피 코트를 벗고 새하얀 앞치마를 둘렀다. 올해의 마지막 저녁은 근사하게 차려 먹고 싶었다.


    식탁에 깨끗한 식탁보를 두르고 사과와 자두로 속을 채워 구운 거위를 올려놓았다. 새하얀 접시 옆에 칼과 포크를 나란히 놓고 자리에 앉았다. 구운 거위에서 먹음직스럽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지만 손끝이 시려서 도무지 칼과 포크를 들 수 없었다.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양초를 피워야 이 추위가 가실까? 문득 창밖으로 집 두 채 사이 모퉁이에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소녀가 보였다. 


    그 시절의 나는 따듯한 집이면 바랄 게 없었는데, 지금은 집 안에서도 추위에 떨었다. 어쩌면 소녀가 바란 건 따듯한 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쇠 난로에 둘러앉아 함께 발을 녹이고, 탁자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저녁을 먹고,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서 선물을 열어 보며 웃음꽃을 피우는 가족. 그 옛날 소녀는 따듯한 집이 아니라 따듯한 가족을 바랐던 것이다. 아, 미련하게도 이제야 그걸 깨닫다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코트도 걸치지 않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구석진 모퉁이로 향했다. 내 발소리를 듣고 소녀가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어깨에는 눈꽃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소녀는 다 타버린 성냥 꾸러미를 움켜쥔 채 내가 내민 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우리 집으로 가자꾸나.

우리 집에는 양초가 아주 많단다. 네 성냥으로 양초를 밝혀 주렴. 

구운 거위도 함께 먹어 주려무나. 너무 커서 나 혼자서는 다 먹을 수가 없단다."


    소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손끝에 온기가 퍼졌다.




    성냥팔이 소녀가 죽어 가면서 진정으로 꿈꾸었던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노인이 된 성냥팔이 소녀는 그 옛날 자신이 꿈꾸었던 것을 모두 손에 넣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습니다. 물질을 부르짖는 세상 속에서 우리 마음에 온기를 전하는 것은 사람 간의 따듯한 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여성의 자립과 연대를 보여 주고,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도움을 받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짚고 싶었습니다. 온기는 나눌수록 더욱더 따듯해지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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