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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주일장춘몽 May 24. 2022

공산성에서 떠올려 본 옛날이야기

낯선 눈으로 보고 쓰는 공주


팔랑팔랑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한 마리 나비 같다.

공주는 찔레꽃 향기를 쫓아 귀밑머리를 흩날리며 산성 문을 벗어나 금강 변으로 달려간다.

쏟아지는 5월의 햇살 아래 팔랑거리는 공주의 모습을 바라보는 성왕의 자애로운 미소 뒤에 깊은 우물이 깃든다.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신라는 연호까지 세우면서 점점 더 강력한 나라가 되고 있다. 고구려도 백 년 전의 강대함은 꺾였지만 여전히 위협적이다. 선왕께서 이곳 웅진에서 태평성대를 이루셨지만 고인 물은 반드시 썩는 것이 자연의 섭리. 이곳 웅진은 잔잔한 호수 같다. 더 넓고 깊은 곳으로 나가야 이 나라 백제의 백 년 후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성왕은 조용히 그러나 치밀하게 천도를 준비해왔다. 이미 오래전에 내린 결정이다. 이제 와 번복은 없다. 하지만 왕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두 가지가 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완성하고 선왕을 모신 무령왕의 능을 두고 가는 것과 공산성 안에서 나고 자라 이곳을 너무도 사랑하는 어린 공주에게 사비로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올봄 웅진성 망루에서 바라보는 금강 변의 꽃들이 유난히 아름답구나. 산수유가 지나간 자리에 개나리 진달래가 앞 다퉈 피더니 황매화, 영산홍, 수수꽃다리들이 이어받고 조팝꽃, 이팝꽃, 찔레 향에 어지러울 지경이다. 초록 천지 녹음에 피는 흰 꽃들이 왜 이리도 서러운지... '    



                                                                                                    537년 5월 어느 날     






금강교를 건너 공산성에 오른다. 공산성에 처음 왔던 때는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봄이었다. 비가 온 다음 날이었는데 날은 춥고 산성 둘레길이 질척이고 미끄러워서 아이와 둘이 무척 고생했었다. 지금은 산성 안의 모든 길이 포장되어 있어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질척이지는 않겠다. 하지만 오래 걷다 보면 발이 피곤할 것 같고 무엇보다도 운치가 없다. 그래도 명색이 백제의 성벽길인데...     


공산성 입구인 금서루(서문)에서 왼쪽으로 성벽길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공산정이 나온다. 공산정 앞에 작은 돌탑들이 총총히 쌓여 있다. 탑에 그저 작은 돌멩이 하나를 얹으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그렇게 간절하게 빌었을까? 층층이 쌓인 돌들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사람들의 소원을 듣고 있었을까? 빌고 싶은 소원이 있었지만 먼저 다녀간 많은 이들의 정성에 숟가락 얹는 것 같아서,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소원을 들어온 돌멩이들이 왠지 짠해서 그냥 돌아섰다.     







강바람이 시원한 공산정에 앉아 땀을 식히는데 문득 단청에 눈길이 갔다. 백제 시대 산성의 누각인데 단청이? 그때도 단청 기술이 있었나? 공산정은 백제의 건축물이 맞을까? 슬쩍 자료를 찾아보니 선조 36(1603)년에 공산성 공북루를 신축하고 그 뒤로 여러 차례 개축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곳 공산정과 관련된 기록도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등장한단다. 돌로 쌓은 석축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어떤 돌은 성도 없는 백제 사람이 쌓은 것이고 어떤 돌은 임진왜란 이후 김 서방, 이 서방이 다듬어 쌓은 것이다.     




한동안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타임캡슐’이란 단어를 많이 썼다. 주로 20세기 말, 21세기 초 무렵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쩐지 촌스러움이 묻어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찾자면 이만큼 적합한 단어도 없다. 공산성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백제시대였지만 지금 우리가 만나는 공산성은 493년부터 2022년까지 1530여 년의 세월을 담은 ‘타임캡슐’ 임이 분명하다.      


공산성 성벽길은 오르락 내리락이 있는 편이다. 명색이 산성이니까. 나도 그동안 제법 걸어 다녔다고 자부하는데도 중간에 쉬지 않고 오르기에 아쉽게 실패하는 구간이 있다. 하지만 바로 발 앞만 보고 숨을 고르며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비록 중간에 멈춰 선다고 해도 남은 계단은 매번 조금씩 줄어있다.      

자꾸만 턱을 치는 숨을 참아가며 계단을 오르면 성벽 가장 높고 탁 트인 곳에 도착한다. 힘들게 올라온 보람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는 장소. 한 겨울에도 이곳에 오르려면 등허리가 후끈 하지만 강바람이 금방 식혀준다. 그래도 물 한 병은 필수!     


백제는 웅진에서 정치적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공북루는 백제시대 대규모 왕궁 관련 유적지다. 이곳에 왕궁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궁 부속 건물지가 상당수 남아있다. 저수시설과 배수로, 아궁이가 있는 기와 건물지와 철기 공방지도 발견됐다. 조금만 천천히 다니면 안내문에 적힌 자세한 설명이 보인다. 관심을 가지고 조금만 생각을 넓히면 백제가 가까워진다.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이다. 세계적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공산성의 역사적 의미를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공산성이 있어서 공주가 가볼 만한 곳이고 아름다운 곳이라는 사실만 안다면 나머지는 천천히 알아도 괜찮고 몰라도 괜찮다. 산책 장소로, 소풍 장소로 공산성이 가까이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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