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 한편씩을 필사하며 읽고 있다. 요즘 책을 너무 후루룩 보고 마는 것 같아서 꼼꼼하게 읽고 소화하는 연습을 다시 할 겸 필사를 시작했는데 제법 만족스럽다. 오늘 읽은 시 <컬러텔레비전>에 이런 구절이 나왔다.
앞으로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냐고
컬러텔레비전을 보시면 얼마나 더 보시겠냐고
결혼하고 첫 해 시어른 생신을 앞두고 큰 시누이가 나에게 했던 말이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냐. 이제야 며느리 보셨는데 당연히 며느리 손에 생신상 받고 싶으실 거다. 우리는 자네가 상다리 휘어지는 잔칫상을 차려주면 고맙게 먹을 거고 간장종지만 놓고 먹으라고 해도 뭐라 안 할 테니 부담 갖지 말고 알아서 생신상 차려라.
시아버님 연세 예순다섯, 시어머니 쉰여덟 되던 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얘기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 같았지만 갓 결혼한 새색시가 입 밖으로 꺼낼 말은 아니었다. 음식 솜씨 좋은 친정엄마 어깨너머 배움과 당시 유행했던 요리책을 동원해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발휘해서 생신상을 차렸다. 난생처음 해본 음식이라 맛은 보장 못하지만 정성만큼은 대장금이 차린 임금님 수라상 못지않았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하면 내가 그 집의 가족이 될 줄 알았다. 나를 마음으로 받아줄 줄 알았다.
그렇게 시작해서 시집 대소사에 음식 독박을 쓰게 된 지 올해로 23년. 명절이나 시어른 생신은 물론이고 어떤 이유로든 시집에 가면 음식은 내가 알아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어떤 음식을 차릴지 어떤 재료가 필요한지 언제 어떻게 만들지 등등의 모든 것들이 내 소관이었다. 차라리 주방이 가장 마음이 편했다. 관심사도 전혀 다르고 생각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얘기를 듣고 있느니 주방에 있는 편이 나았다.
시아버님 돌아가신지 올 해로 11년이 됐다. 집집마다 제사 예법은 차이가 많고 시아버님이 본가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차남이시라 남편 집안의 제사를 본 것은 채 서너 번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제사상 역시 처음부터 내가 맡아서 해야 하는 일이었고 막상 차리려고 보니 그 집안의 제사상은 내가 알던 것과 아주 많이 달랐다.
열 번의 제사를 내 손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올봄 시어머님이 폭탄선언을 하셨다.
십 년 했으니 나는 할만큼 했고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다. 언제 받아도 너희가 받을 일이니 이번에 모셔가라. 마침 큰아들도 세례를 받았으니 천주교식으로 해도 나는 상관없다.
대체 뭐가 그렇게 힘이 드셨을까? 휴일도 아니고 평일 밤늦게 하는 제사에 일하다 말고 허겁지겁 내려온 큰며느리에게 음식 다 맡기시면서 뭐가 그리 힘드셨을까? 설거지에 뒷정리까지 다 하고 새벽 기차 타고 올라와서 출근한 건 난데 어머님은 뭐가 그리 힘드셨을까? 혹시 힘들어하는 나를 보는 게 힘이 드셨나?
자기 가족들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남편은 뭉그적대다가 결국 제사를 덜렁 받았다. 남편이 내 눈치만 보면서 혼자 끙끙대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여태까지처럼은 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터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억울해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이번 제사는 내가 제안한 방식으로 지냈다. 오전에 성당에 연미사 다녀오고 저녁에는 연도를 했다. 남편은 무척 서운해하는 눈치였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은 남편이 아버지 제삿밥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차마 제대로 제사상을 차려달라는 말은 못 하고 내년 제사에는 연도 말고 우리 먹는 저녁밥에서 한 숟가락씩 덜어 아버지 드실 밥을 챙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시집 구성원들 가운데 가장 고지식하고 바뀌지 않는 건 시어머님이 아니라 남편이다. 남편은 역시 어쩔 수 없는 남의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