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는 언어의 실패다
죽음은, 이름을 얻는 순간 삶이 된다
나는 존재의 윤곽을 찢고 나온 바람
형상도 질감도 없이, 사라지지 않는 사라짐이다
시간은 묘지의 풀을 자르며 더해간다
그러나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나는 ‘아직’과 ‘이미’ 사이,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
꽃은 무로 피어난다
추모는 존재를 증명하는 장치가 아니라
그 부재를 은폐하려는 의식이다
나는 묘지를 불태우고 싶다
돌과 흙, 이름과 기억을 재로 만든 뒤
그 잿빛 속에서 피어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것이 나다
죽음보다 더 낯선 생명
기억보다 더 망각한 언어
형체 없이 존재하는
무(無)의 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