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바다는 잠에서 덜 깬 얼굴처럼 잔잔했고 맹숭맹숭했지만, 그 속에는 곧 하루 종일 반짝이게 될 물비늘만큼이나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숨결과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여인은 아직은 이른 시간, 어둠이 완전히 걷히기 전,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그림자처럼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숨을 고르며 물 위로 떠오를 때마다, 물결은 그녀의 손끝으로 차갑게 밀려왔고, 차가움 속에서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듯한 아련함이 스쳤다. 그녀의 작은 가슴은 바다로 가득 찼다가 이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손으로 더듬는 소라껍질, 반짝이는 조개, 그리고 파도 속에서 그녀를 스쳐가는 작은 물고기들. 그 모든 것이 여인의 하루를 채우는 시였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떠났던 그날도, 바다는 이런 숨결로 밀물, 썰물의 그림자까지 남김없이 삼켰으리라. 여인은 잠시 눈을 감고 기억 속으로 물살처럼 스며들었다. 바닷물은 차갑게 피부를 파고들었다.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짧은 두려움이 목구멍을 스쳤지만, 곧 익숙한 무게와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면, 여인은 망사리에 소라와 전복을 이고 마을로 돌아왔다. 이웃들은 짧은 눈인사를 건네며 그녀의 젖은 옷자락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에는 연민과 호기심, 그리고 동경인지 경외인지 이해할 수 없는 무게가 섞여 있었다. 그러면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바람에 젖은 머리칼을 털며 집으로 향했다.
낡은 초가집 안, 아들은 작은 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거동은 불편했지만, 눈빛만은 누구보다 날카롭고 깊었고, 다정했다.
"엄마, 오늘은 많이 땄어?"
그가 묻자, 여인은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손바구니를 내밀었다. 아들의 눈동자가 바구니 위에서 반짝였다. 그는 직접 바다에 갈 수 없었지만, 어머니가 물속에서 건져온 것들을 통해 세상의 한쪽을 배웠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여인은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뒷동산으로 오르는 길, 붉게 물드는 바다를 바라보며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고, 마음은 바람과 파도 사이에서 흔들렸다. 산마루에 올라서자, 수평선 너머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인은 가만히 숨을 고르고, 입술을 떨며 한 이름을 속삭였다. 남편의 이름, 그리고 그것을 삼켜버린 바다. 눈물이 파도처럼 흘러내렸다. 아들은 창문 너머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어머니의 어깨는 어느 순간 파도처럼 일렁였고, 멀리서도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남편이 바다로 나간 것은 다섯 해 전, 음력 칠월 보름이었다. 그날 바다는 유난히 검푸른 유리처럼 빛으로 출렁였다. 풍랑은 아직 잠들어 있었지만, 바닷가 마을의 노인들은 "오늘은 나가지 말라"고 거듭 경고했었다.
그러나 그는 뱃전 가득 그물을 싣고 서둘러 검푸른 바다를 향했다. 어쩌면 욕심 때문이었을지도, 어쩌면 그날따라 그녀와 나눈 다툼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여인은 아직도 그 아침, 그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한동안 말이 없던 남편이 문턱을 넘으며 짧게 내뱉었던 한마디.
"당신은 몰라, 내가 어떤 바다를 안고 사는지."
"이제 곧 다 갚을 수 있어."
빚을 말하는 것인지, 혹은 더 오래된 무언가를 뜻하는 것인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인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의 무게는 바닷물보다 깊었고, 여인의 가슴속에서 눈물과 후회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날 밤이 되자, 바다는 그의 몸을 삼켰다. 파도는 검은 비단처럼 배를 휘감았고, 별빛은 잠시 흔들리다 사라졌다. 부서진 배 조각이 떠내려왔을 뿐, 그의 몸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안타까움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입을 모아 속삭이기 시작했다.
"빚 때문에 바다로 몸을 던진 게 아니겠나."
"아니야, 같이 나갔던 놈과 말싸움이 있었다더라."
"그 여인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어."
소문은 바람처럼 자주 모양을 바꾸며 떠돌았다. 여인은 그 바람 속에서 자신을 자책하며 울었다. 바다는 남편을 삼켰지만, 그 슬픔과 죄책감은 매일 밤 그녀를 붙잡았다. 여인의 귀에도 자꾸만 들어왔다. 바다에서 홀로 남겨진 그녀에게 사람들은 동정을 건네면서도, 뒤돌아서는 의혹을 내뱉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여인은 자신을 괴롭혔다. 그날 마지막 다툼, 그날 마지막 눈빛. 혹시 자신이 그를 바다로 내몬 것은 아닐까. 바다는 남편을 삼켰지만, 그 죄책감은 매일 밤 여인의 가슴을 삼켰다. 아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남편을 잃은 어머니가 매일 저녁 울음을 삼키는 이유를 순수한 상실로만 여겼다. 하지만 아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바다는, 여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매일같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들은 그 모든 것을 몰랐다. 그의 세계에서 바다는 멀리서 관찰하는 유리창 같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내면에서는 끝없이 출렁이는 폭풍으로 존재했다.
아들은 늘 창문 곁에 앉아 있었다. 바닷바람이 스며드는 그 자리는, 몸이 불편한 그가 세상과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단순했다. 바다, 언덕, 그리고 바다로 들어서는 어머니의 뒷모습. 그러나 아들의 눈에는 그것이 매일 달리 보였다. 어머니의 어깨가 무겁게 젖어 있으면 바다는 더 깊은 골짜기 같았고,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웃음을 지으면 바다는 마치 빛을 머금은 푸른 들판처럼 보였다.
아들은 글자를 배우고 있었다. 마을에 새로 들어온 젊은 선생이 거동이 불편해 주저앉은 그를 위해 책과 종이를 가져다주었다. 손은 느렸지만, 마음은 굶주리듯 글자를 삼켰다. 언젠가 그는 바다를 글로 그려내고 싶었다. 자신은 두 발로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적어도 글로는 바다를 품고 싶었다.
"엄마는 왜 매일 저녁 울어?"
어느 날, 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여인은 대답하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아들은 그 침묵이 곧 답이라는 걸 알았다. 어머니의 눈빛은 언제나 바다와 닮아 있었으니까.
밤이 되면 아들은 몰래 일기를 썼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어머니의 손에 묻은 소금 냄새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의 빛깔을 기록했다. 그리고 가끔은, 보지도 못한 아버지에 대해 적었다.
"아버지는 왜 바다로 간 걸까. 어머니는 왜 그 이름을 부르며 울까. 나는 왜 이 땅 위에서만 머물러야 할까."
글을 쓰다 보면, 아들은 이상하게도 자신이 바다에 한 걸음 다가선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글자는 물결처럼 이어졌고, 그 속에서 그는 자유롭게 걸었다. 그는 아직 몰랐다. 자신의 글이 언젠가 어머니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열쇠가 될 것임을.
저녁이면 여인은 어김없이 뒷동산에 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발걸음을 묻지 않았다. 누구나 알았기 때문이다. 그곳에 서야만, 여인이 하루를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수평선은 불길처럼 붉게 타올랐다가 곧 검푸른 어둠 속에 잠겼다. 그 붉음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며 바다를 숨죽인 심장처럼 만들었다. 그 순간마다 여인은 남편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지막 날, 남편은 낮게 웅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은 몰라. 내가 어떤 바다를 안고 사는지."
그 말속에는 바람보다 무거운 심연이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여인은 끝내 묻지 못했다. 대신 화가 난 얼굴로 등을 돌려버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밤, 풍랑이 일었고, 그의 배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은 종종 스스로를 괴롭혔다.
'내가 잡아 세웠다면, 내가 미안하다 말했더라면, 그는 바다로 나가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다는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그저 파도는 부서져 흩어졌고, 그 속에 묻힌 이름은 언제나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
그녀는 조용히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바람이 받아갔는지, 파도가 삼켰는지 알 수 없었다. 바람에 실려 사라지면서도, 그 속에 남겨진 사랑과 후회는 파도 속에 녹아 있었다. 울음은 점점 커졌다. 그 울음 속에는 단순한 슬픔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처 풀지 못한 사랑, 끝내 전하지 못한 말, 그리고 자신이 짊어진 죄책감이 뒤섞여 있었다.
멀리 집 창문 너머, 아들이 앉아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흔들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울음은 파도처럼 일렁였고, 어느 순간엔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아들은 아직 몰랐다. 그 울음 속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바다가 숨어 있다는 것을.
그날, 바다는 평소와 달리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은 집을 흔들 만큼 거세게 몰아쳤다. 여인은 아들이 걱정되어 집 안을 살폈지만, 그의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아들은 창문을 넘어 바다를 향해 나간 것이었다.
"아버지가 있는 바다를… 직접 봐야 해."
그의 마음은 두려움과 호기심, 그리고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으로 흔들렸다. 여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몸이 불편한 아들이 폭풍 속 바다로 나갔다니. 한순간,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집을 뛰쳐나와 뒷동산 길을 달렸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고, 파도 소리가 귓가를 찢었다. 산마루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아들을 발견했다. 허리가 굽은 작은 몸이 파도와 바람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아들!"
여인의 외침이 폭풍 속에 날아가, 그의 귀까지 닿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향해 손을 뻗고,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
여인은 아들의 손을 잡았다. 비바람 속에서도, 서로의 손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바다는 남편만 삼킨 것이 아니라, 자신과 아들에게도 무수한 공포와 고통을 남겼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 바다와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모자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파도 앞에서 한동안 서 있었다. 눈물과 빗물이 뒤섞여 흘렀지만, 그 울음은 이제 슬픔만의 울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사랑과 이해, 그리고 삶을 살아내겠다는 결심이 들어 있었다. 아들은 그날, 처음으로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인은 그날, 처음으로 바다 앞에서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폭풍이 지나간 후, 하늘과 바다는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산마루에 서 있는 모자에게는 여전히 바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흔적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품고, 또다시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었다.
폭풍이 지나간 아침, 바다는 잔잔했다. 물빛은 투명했고, 햇살이 부서져 수평선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모자(母子)는 아직 뒷동산에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마음속으로 남편의 이름을 되뇌었다.
"....."
이제는 울음이 아닌, 조용한 속삭임으로. 그 이름 속에는 더 이상 원망이나 죄책감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기억과 사랑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아들은 종이에 펜을 들었다. 폭풍과 바다,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을 글로 담고 싶었다. 손은 느렸지만, 마음은 바다만큼 넓게 움직였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바다로 갈 수 없지만, 글로 바다와 삶을 잇는 다리가 될 수는 있어."
마을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모자의 마음속 바다는 달라졌다. 두려움과 슬픔 대신, 이해와 연민, 그리고 살아내야 할 힘이 파도처럼 흘렀다. 저녁이 되면 여인은 다시 뒷동산에 오르겠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들은 창문 너머가 아니라, 바로 어머니 곁에서 바다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바다는, 여전히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남편의 이름, 어머니의 울음, 아들의 글자와 마음까지. 모든 것이 한데 섞여,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흐르고 있었다. 바다는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 속에서, 모자(母子)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